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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 중산층 부부 "조만간 밥 굶게될까 걱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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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아르헨티나의 지난 10년은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는 매우 가혹한 세월이었다. 실직 등으로 수입은 크게 준 반면 생활비는 늘어나 많은 사람들이 빈민층으로 전락했다.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 서민들의 부담을 가중시킨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난 데그란디 부부도 생활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을 매일 매일 느끼며 살고 있었다. 그의 집안 곳곳에선 언제 빈민층으로 떨어질지 모를 불안이 묻어나왔다.

1991년 결혼할 때만 해도 이들 부부는 행복에 부풀어 있었다. 남편은 중소기업들의 세무업무 등을 관리해 주는 회사에 다녔으며, 부인은 옷감회사와 의류회사를 연결해 주며 수수료를 챙기는 일을 했다.

당시 부부의 한달 수입은 2천2백~2천5백페소. 그땐 물가가 지금보다 쌌기 때문에 이 정도 돈이면 풍족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이 페소와 달러의 환율을 1대 1로 고정시키는 정책(페그제)을 채택, 살인적인 인플레를 진정시킨 덕분이었다.

처가에서 장인.장모와 같이 살았기 때문에 집을 장만하는 부담도 없었다. 이들은 휴가 때면 한달씩 먼 지방으로 여행을 다녔으며,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도 자주 했다. 승용차도 부부가 한 대씩 굴렸다. 94년 부인이 아기를 낳고 직장을 그만뒀지만 남편 혼자서 벌어도 별로 쪼들리지 않았다.

90년대 후반에 들어 경기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특히 전기.가스.전화 등 공공요금이 크게 오르면서 살림살이가 빠듯해졌다. 한달에 30페소 정도였던 전화비가 1백페소 이상으로 뛰었다. 전기요금도 월 20~25페소에서 세배 이상으로 올랐다.

국영기업들이 잇따라 해외에 매각되면서 새로 주인이 된 외국기업들이 경영합리화를 이유로 공공요금을 대폭 인상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고용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국영기업에서 해고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데그란디 부인은 다시 일을 하려 했지만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궁리한 끝에 자가용 한대를 레미스(일종의 콜택시)업자에게 빌려주기로 했다. 택시영업 수입의 일부를 수수료로 받는 조건이었는데 기름값을 빼고 나면 이 역시 별 돈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남편이 직장에서 쫓겨났다. 우선 차를 한대 팔아 급한 불을 끈 뒤 남편은 콜택시 기사로 직업을 바꿨다.

정부의 긴축정책으로 돈이 돌지 않으면서 수입은 갈수록 줄어 최근에는 한달에 1천페소를 벌기도 어려워졌다. 장인.장모에다 여덟살 난 아들까지 다섯식구가 간신히 굶지 않을 정도다. 최대한 절약하며 버티고 있지만 이대로 가다간 몇달 뒤면 끼니를 걱정해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다. 수도요금과 쓰레기 처리비는 벌써 반년치나 밀렸다.

설상가상으로 의료비 부담은 커졌다. 장모는 지병이 있어 정기적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약을 사먹어야 한다. 병원비는 공짜지만 약값은 내야 한다. 이전에는 노인복지기금에서 약값까지 지원해 줬다. 그런데 복지기금 이사장이 공금 횡령 혐의로 구속되는 바람에 사정이 달라졌다. 조사 결과 기금이 바닥난 것으로 드러나 약값 지원이 중단된 것이다.

데그란디 부부는 자신들이 못살게 된 것이 정치인들의 부패와 공무원들의 무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들 부부는 내년 3월 대통령 선거에서 어느 쪽이 정권을 잡더라도 경제사정은 별로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정완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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