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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너무 나간 '의원의 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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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 김종혁 워싱턴 특파원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최근 망신을 당했다. 중앙정보국(CIA)과 국방정보국(DIA) 등 15개 정보기관을 통합하기 위해 의회에 제출한 정보법안이 공화당 하원의원들의 반발로 무산됐기 때문이다.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법안 저지 로비를 하는 등 여권 내부에서 파워게임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재선에 성공해 기세가 충천한 대통령의 법안을 여당 의원들이 대놓고 거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의회가 힘이 세다는 방증이다.

미 의회는 수시로 행정부 인사들을 불러다 청문회를 연다. 물론 국익과 관련된 사안은 여기서도 비공개다. 대신 행정부는 여야 의원들에게 정보를 성의껏 알려준다.

부시 대통령이 대선 TV 토론 때 민주당 후보인 존 케리 상원의원에게 "대통령인 나나 상원의원인 당신이나 그동안 이라크에 대해 똑같은 정보 보고서를 받아봤다. 이제 와서 나한테만 판단을 잘못했다고 몰아붙이느냐"고 불만을 토로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행정부가 의원들에게 비밀사항을 브리핑하는 건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공개되면 외교 쟁점으로 비화할 내용도 적지 않지만 의원들이 국익을 먼저 생각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지난달 30일 "미국이 추진 중인 주한미군의 '지역 역할'은 북한과 중국에 대한 선제 군사 개입을 위한 것"이라고 공개했다. "용산기지 이전 협정도 주한미군의 이런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곁들였다.

만일 사실이면 당장 중국이나 북한이 쌍심지를 켜고 나서, 외교 쟁점이 될 수 있는 사안이다. 국내의 반미정서에 다시 불을 붙이고 미군 철수론이 터져나올 수도 있다.

한데 한국과 미국 국방부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면서 펄쩍 뛰고 있다. 회의 자료로 올라간 여러 논문 내용 중 한 대목일 뿐인데 그걸 전체인 것처럼 주장했다는 것이다.

국민에게 시급히 폭로해야 할 사안에 대한 판단 기준은 국회의원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국가의 운명과 직결되는 국방과 외교안보 문제만큼은 그런 범주에서 제외돼야 한다. 우리보다 훨씬 잘살고 힘센 나라의 의원들도 국익이라는 단어 앞에서 항상 신중하게 처신하지 않는가.

김종혁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