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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적과의 협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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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취향도 성격도 이상형도 다른 남녀가 우주 어떤 행성의 유리 울타리에 갇혀 있다. 그들은 핵무기로 지구가 없어졌다는 사실도, 거대한 외계인에 의해 관찰되고 있다는 사실도 아직 모르고 있다. 여자는 인간에게서 사랑과 웃음과 예술의 가치를 발견했다. 남자는 인간에게서 위선과 잔혹성과 악의를 봤다. 여자는 감성적이고 열정적이고 행동적이지만, 남자는 이성적이고 냉소적이고 차갑다.

그들은 몇 날 며칠을 싸우다가 자기들이 인류의 마지막 남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외계인의 애완존재로 키워지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둘의 적대적인 관계는 그들이 처한 조건을 인식하면서 조건 없이 사랑하는 관계로 바뀐다. 현존하는 마지막 인류로서 종족 유지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사랑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최근에 쓴 희곡 '인간'의 줄거리다. 작가는 '인간'에서 대화와 협상을 통해 차이를 받아들이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통의 목표를 찾아 움직이는 인간의 어떤 속성을 부각하려 했다.

남녀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의중을 타진해 보다가 대화를 포기한다. 그러다 생존을 위해 타협이 필요해지자 다시 말을 건네기 시작한다. 자기들이 마지막 인류라는 사실을 안 뒤엔 적극적인 협상에 들어가 '사랑해야 한다'는 합의점을 찾아낸다. 대화와 협상은 차이가 적대적일수록, 처한 현실이 위험할수록 발휘되는 인간성의 한 측면이다.

칠레 산티아고에서 있었던 한.미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협상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 김정일은 믿을 수 없지만 협상은 해야 한다"고 간곡하게 부탁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의 주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2년 서울에 온 부시 대통령에게 했던 말과 비슷하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레이건 대통령도 소련을 악마라고 했지만 그 악마와 대화하지 않았느냐. 나쁜 사람과도 대화는 해야 한다"고 했었다.

부시 대통령은 김정일을 정상적인 인간이기보다 악의 축으로 보고 있다. 그가 전.현직 한국 대통령의 이런 말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헤아리기 어렵다. 그렇더라도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을 대화와 협상의 상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노력을 멈춰선 안 될 것 같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