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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포럼

작은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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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004년도 저물어 간다. 일본에선 올해의 용어로 욘사마를 뽑았다니 괜스레 우쭐해진다. 우리는 어떨까? 욘사마는 우리에게도 중요 후보다. 황우석, 양궁, 탁구, 싸이월드, 불황, 국가보안법, 최근의 휴대전화 수능 부정 등도 있다. 친일 청산과 신기남.김희선 의원도 반열에 오를 만하다.

그런 중에도 헌법재판소가 으뜸이 아닐까 싶다. 올 두 차례의 판결이 갖는 헌정사적 의미가 각별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절대권력의 상징인 대통령을 '쥐락펴락' 했다. 대통령 탄핵 문제는 입법부와 대통령의 씨름이었다는 점에서 심판을 맡은 헌재가 자동적으로 막강의 위치에 올랐다. 수도 이전 관련법은 입법부가 마련한 법이자 대통령이 최우선으로 추진하던 정책이다. 이를 위헌이라고 제동을 걸었으니 대통령과 입법부를 향해 동시에 한 방씩 날린 것이다. 이런 사법부를 두고 누가 대통령의 꼭두각시라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사법부의 약진은 상대적으로 행정부와 입법부, 특히 대통령의 위축으로 이어졌다. 그러고 보면 대통령에겐 올 한 해가 시련의 해였다. 퇴진위기에 몰렸던 노무현 대통령 개인이 그렇고, 권한과 권위가 자꾸 졸아드는 대통령 자리 또한 그렇다. 역대의 제왕적 대통령과 비교해 보면 초라하고 작은 모습이다.

그러나 이 '작은 대통령'은 노 대통령의 의도와 맞아떨어진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우선 입법부와의 거리다. 노 대통령은 당정분리를 선언한 뒤 정치엔 초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국회가 시끄러워도 그건 국회가 알아서 할 일이라며 나몰라라한다. 물론 야당 측에선 대통령이 뒤에서 작용한다고 의심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다른 대통령들이 여당 총재를 겸직하며 국회를 거수기쯤으로 여긴 것과는 사뭇 다르다. 국회뿐만이 아니다. 이해찬 총리의 목소리가 역대 어떤 총리보다 크게 들린다. 노 대통령은 선거 결과 제1당에 총리 자리를 주겠다고까지 공언했었다. 2원집정제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그것도 부족해 내각을 다시 분야별로 나눠 부총리 및 실세 장관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 같은 노 대통령의 통치원리는 자율과 분권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추구하는 가치는 권위주의 청산이라고 읽힌다. 취임 때부터 검찰.국정원과 선 긋기를 선언했다. 입법.사법부를 사실상 장악하고 검찰과 국정원을 수족처럼 부려가며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했던 역대 대통령들과 비교해 보라. 노 대통령의 '작은 대통령'실험은 분명 민주주의의 진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 실험이 성공하고 뿌리를 내리기 위해선 대통령의 민주적 리더십이 빛을 발하고 국정운영의 효율성이 뒷받침돼야 한다. '작은 대통령' 자체가 최종 목표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공허하다. 권한을 모두 나눠줘 그런 것일까. 부동산.연기금.금융정책 등 정책현안마다 당.정.청이 다른 목소리를 내며 혼선을 빚고 내각 안에서도 삐걱거린다. 국정을 종합적으로 통할(統轄)하고 조율하는 기능이 보이지 않는다.

여야 대결로 꼬인 정국을 대통령이 나몰라라하는 것도 잘못이다. 대통령은 특정 정당의 공약을 앞세운 정당 대결의 산물이다. 현실정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이른바 개혁입법 역시 대통령의 역점 추진 정책들이다. 그걸 둘러싼 여야 싸움에 대통령이 뒷짐진 채 빠지겠다는 것은 책임회피다.

제왕적 대통령의 폐단을 돌아보면 '작은 대통령'은 우리가 가야 할 지향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권한축소가 정치포기나 국정혼선으로 이어져선 곤란하다. 쪼개진 권한을 큰 틀에서 조율하고 관리하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통합의 리더십이다. 그게 부족하면 자칫 업적까지도 작은 대통령으로 기록될지 모른다.

허남진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