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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보위사, 포섭 간첩에 마약 주며 “팔아 공작금 써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1999년 5월 중국 웨이하이(威海)에서 체류 중인 김모(55)씨에게 한 여성이 접근했다. 김성복이라고 이름을 밝힌 그녀는 “얼음을 대량으로 구해주겠다”고 말했다. ‘얼음’은 히로뽕을 일컫는 은어다. 김씨는 그해 3월 검찰의 마약수사를 피해 중국으로 출국해 도피 중이었다. 그는 이미 히로뽕 투약 혐의로 복역한 적이 있다. 두 달 뒤 두 사람은 옌지(延吉)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김성복은 며칠 동안 집을 비운 뒤 돌아와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사실 나는 북한 보위사령부 소속 공작원인데 당신과 동거한다는 사실을 들켰다. 그러나 당신이 보위사 일을 함께 맡아준다면 처벌을 면하고 같이 살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보위사령부는 북한의 군 정보기관이다. 반혁명 사범을 수사하거나 탈북자를 단속하는 곳이다. 오갈 데 없는 처지였던 김씨는 2000년부터 2003년까지 모두 일곱 차례 북한을 드나들었다. 김씨는 북한에서 김일성 동상에 헌화하고 공민증(주민등록증)을 받았다. 북한군 중좌(중령) 계급장의 군복을 입고 사진까지 찍었다.

김씨는 보위사의 신모 보위부장(소장 계급)의 지령을 받아 2000년부터 간첩으로 활동했다. 그의 임무는 중국에 파견된 한국 국가정보원 직원의 신상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있다. 또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주선한 중국동포와 한국인, 북한 미사일 기지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여성 탈북자 등을 북한으로 납치하는 공작에 가담했다.

2000년 3월 그는 50, 100㎏ 단위로 히로뽕을 팔 수 있는 루트를 뚫으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북한 외화벌이사무소에서 히로뽕 2㎏을 받아갔다. 판매대금 30%는 조선노동당에 상납하고 나머지는 공작금으로 사용하는 조건이었다.

북한산 히로뽕은 순도가 높아 2008년 기준으로 g당 8~15달러에 거래됐다. 실제로 김씨와 마약거래를 시도한 나모(35·복역 중)씨는 “(샘플을) 직접 투약해보니 효과가 빠르고 오래 지속되는 최상급이었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김씨는 거래처를 확보할 경우 “구기자를 사겠다”는 암호로 상부에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중국에서 한국인 마약 밀매상과 일본 야쿠자,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흑사회 같은 국제 폭력조직과 접촉했다. 히로뽕 1㎏은 샘플로 뿌렸고, 1㎏은 다른 북한 공작원에게 넘겨줬다.

하지만 김씨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많은 물량을 한꺼번에 소화할 거래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2003년 이후 김씨는 북한으로부터 사실상 ‘용도폐기’됐다.

중국 공안 당국이 김성복을 마약 밀반입 혐의로 체포하자 김씨는 귀국을 결심했다. 그는 지난달 8일 국내로 입국했으나 중국에서부터 김씨를 추적하던 국정원의 통보로 인천공항에서 검거됐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는 김씨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했다고 25일 밝혔다. 오세인 중앙지검 2차장검사는 “북한 공작기관이 외화벌이를 위해 마약을 생산·판매한다는 첩보가 처음 사실로 확인됐다”며 “북한산 마약 거래처에 대한 추적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이철재·홍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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