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당당치 못한 '황장엽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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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황장엽(黃長燁)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방미(訪美)논란에 대처하는 한국 정부의 자세가 답답하다 못해 안타까울 지경이다. 일관성도 없고, 논리도 없다.

미 의회 증언을 위해 黃씨의 출국을 허용해 줄 것을 한국 정부에 촉구했던 미 의원들은 한국 정부가 계속 응하지 않자 최근 콜린 파월 국무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 정부와 교섭해 달라고 요구했다.

크리스토퍼 콕스 하원 공화당 정책위원장 등 3명은 편지에서 양성철(梁性喆)주미 한국대사가 지난 7월 미 의원들에게 밝혔다는 黃씨 방미 불허 이유를 이렇게 소개했다. "黃씨의 증언은 북한의 독재자를 당황케 하고 화나게 만들어 남북대화를 틀어지게 할 것으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염려하고 있다."

당초 한국 정부는 黃씨의 신변문제만 보장된다면 방미를 허용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국무부가 미 의회에 黃씨의 안전을 책임지겠다고 하니까 梁대사가 털어놓은 진짜 이유가 이렇다는 것이다.

梁대사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펄쩍 뛰고 있고, 대사관측은 "미 의원들에게 강력히 항의했다"며 불쾌하다는 반응이다. 梁대사의 항의가 맞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정부의 논리다. 梁대사 본인도 22일 "黃씨 문제는 남북관계 등 제반 상황을 고려해 종합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본국의 훈령을 의원들에게 설명했을 뿐"이라고 시인했다. 표현만 다를 뿐 논리의 줄기는 같다고 할 수 있다.

당초 신변문제를 이유로 내세웠지만 진짜 이유는 黃씨 증언이 몰고올 파장과 부작용에 있음이 사실로 드러난 셈이다. 정부가 黃씨의 방미 증언이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판단했다면 처음부터 소신을 당당히 밝혔어야 옳다. 신변안전이라는 간편한 논리로 접근했다가 일만 더욱 꼬이게 만든 꼴이다.

정부의 부실한 일처리 때문에 한국의 주권이 수모를 겪고 있다. 장승길 전 이집트주재 북한대사를 포함해 미국이 보호하고 있는 망명객에 대해 어떤 나라도 초청은커녕 언급조차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의 보호 아래 있는 黃씨에게는 미 의원의 초청장이 무슨 고지서인 양 툭하면 날아들고 있다. 국가의 자존심이 짓밟히고 있다.

김진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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