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격동의 시절 검사 27년 (1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4. 무서운 오탁근 검사장

초임 검사로서 서울지검에 근무하면서 이영환(李永煥.전 서울고검장)차장과 오탁근(吳鐸根.현 변호사)검사장으로부터 많은 지도를 받으며 검찰 실무를 착실하게 배울 수 있었다.

李차장은 검사들이 결재 올린 사건에 의문이 있으면 주임검사를 불러 일본 법학자가 지은 『주석(註釋)판례집』을 꺼내놓고 토론하기를 즐겼다. 그런데 한번은 내가 강간치상 피의자를 석방하겠다며 결재를 올렸더니 나를 불렀다.

강간 부분은 합의가 됐으나 치상죄니까 피의자를 구속 기소하는 것이 관례라고 지적했다. 그 사건은 강간으로 피해 여성의 처녀막이 파열된 사건이었다.

나는 "강간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기 때문에 성행위에 따른 처녀막 파열은 처벌 가치가 없어 불구속 기소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李차장은 처녀막 파열도 강간에 따른 엄연한 상해이므로 구속 기소하라는 것이다.

나는 "성교행위가 합의 없이 이뤄졌을 경우 성교 자체도 폭행이 되는 것은 법 이론상 맞지만 이미 합의가 됐으므로 폭행으로 취급돼야 할 성교행위는 단순 폭행죄에 있어서 반의사 불벌죄와 같은 결과가 되므로 형식논리에 얽매여 고소 취소가 된 이 사건 피의자를 구속 기소할 필요는 없다"고 건의했다.

새까만 초임검사가 해괴한 이론을 주장하는 것이 귀여웠던지 李차장은 나의 주장을 받아들여줬다.

당시 사건 결재와 관련해 吳검사장을 잊을 수 없다. 그 분은 사건처리 결재에 엄격했다. 어떤 검사를 막론하고 결재를 올린 날은 검사장실에 불려갈 각오를 하고 대기 상태로 있어야 했다.

사건의 결론이 타당한가는 물론이고 기록에 나타난 수사의 미비점 등을 족집게같이 집어내는 바람에 검사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검사장에게까지 올라가는 결재는 보통 석방 사건이 대부분이다. 기소 사건은 차장 전결이었다. 따라서 검사장에게 불려가는 것이 귀찮아 검사들은 어지간하면 그냥 기소를 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한 방에 같이 있는 검사 세 명 중 한 사람이라도 불려가지 않은 날은 기분좋은 날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도 예외가 아니었는지 검사장실에 불려갔다. 역시 피의자를 석방하려던 사건이었다. 나는 사건의 결재를 올리고 틀림없이 검사장실로 불려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 사건 내용을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사건으로 먼저 시비를 건 사람과 싸우면서 위험한 물건을 사용한 혐의로 구속된 피의자를 석방했던 사건으로 기억한다.

이 법(폭처법) 제3조는 벌금형이 없어 사안이 아무리 가볍고 범행 동기에 참작할 점이 있더라도 대부분 구속 기소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나는 범행에 도구를 이용하기는 했지만 당사자가 합의했고 범행 동기와 정상(情狀)에 참작할 점이 있다고 판단해 불구속 기소로 결재를 올렸었다.

吳검사장은 "金검사, 폭력행위 3조 위반을 석방하면 되는가"하고 물었다. 나는 벌금도 없는 죄이지만 구속 때와는 달리 당사자 사이에 합의가 되는 등 사정 변경이 생겼고 시비를 먼저 건 피해자의 상처가 크지 않아 석방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검사들이 요즈음 검사장님의 까다로운 결재를 석방사건에 대한 견제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검사장실에 불려 오는 것을 꺼려 당연히 석방해야 할 피의자까지도 기소해 버리는 풍조가 생겼는데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는 말까지 해버렸다.

물론 그런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사전에 마음먹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吳검사장이 분위기를 유도하는 바람에 평소 내 생각을 뱉어버린 것이다. 어떻든 내 생각대로 결재를 받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곧 이어 중앙정보부에서 법원과 검찰을 출입하는 조정관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검사장이 金형의 소신과 용기를 칭찬하더라"고 말했다. 검사장을 만나기 위해 칸막이 바깥에 앉아 있다가 검사장과 내 대화를 다 들었고 내가 검사장실을 나간 뒤 吳검사장이 "저런 패기있는 젊은 검사들이 많아야 한다"면서 오히려 좋아하더라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서울지검 초임검사 시절에는 후회없이 열심히 일했다.

김경회 <전 한국 형사정책 연구원장>

정리=이상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