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일본의 양심과 사법 정의는 어디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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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일본 사법부, 아니 일본은 끝내 정의와 양심을 저버렸다. 지난달 29일 일본 최고재판소는 군인과 군속, 위안부로 강제 징용됐던 한국인 전쟁피해자와 유족 35명이 제기한 보상청구소송을 기각했다. 이로써 지난 13년간 42차례에 걸쳐 진행돼온 재판절차는 모두 끝났고, 한국인 피해자들이 사법적 판단을 통해 가해자인 일본 국가로부터 개인보상을 받아낼 수 있는 길은 막히게 됐다.

징용 피해자들이 제기한 사안은 국제전범의 처벌을 규명한 다양한 국제 민간법정과 유엔 인권위 등에서 제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국가범죄로 이미 입증된 것들이었다. 일본 최고재판부도 내용 자체만은 부정할 수 없었던지 '일본군에 강제 입대해 전쟁에서 숨지거나 위안부로 끌려가 일본군을 상대하도록 강요받은 사실'은 "인정"했다. 과거 전쟁범죄의 존재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그 책임에 대한 징벌을 외면하는 이율배반적 결정을 내린 것이다.

평화헌법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일본 사법부가 제국주의 일본의 인류에 대한 전쟁범죄를 징벌하지 않는다면 일본에서 사법의 정의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더군다나 재판부는 공판이 시작되자마자 "기각. 소송비용은 원고부담"이란 짤막한 선고문을 읽은 뒤 곧바로 퇴장했다. 이러한 행동이 재판관들의 고민을 내비친 것인지, 우경화되고 있는 일본의 기류를 반영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재판관들의 오만 그 자체인지 궁금하다.

이번 재판 결과는 일본 사법부가 쌓아온 양심과 자유.인권의 마지막 보루라던 이미지에 상당한 훼손을 입혔다. 우경화하는 국가주의의 압력에 양심과 자유.인권을 외면한 치욕의 사례로 오래 남게 될 것이다. 일본이 과거 제국주의 시절의 범죄를 21세기에도 해결하지 못한 채 국제사회에서 파렴치한 국가로 계속 남게 되는 것은 불행이다. 일본이 국력에 걸맞은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지도국가가 되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면 먼저 과거 제국주의 시절의 국가범죄를 얼버무리지 말고 깨끗이 정리하는 용기를 보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