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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기자 앙드레 김의 특별한 만남 - 서혜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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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전 서울 신사동의 앙드레 김 아틀리에. 앙드레 김은 피아니스트 서혜경씨를 조용히 끌어안았습니다. 둘은 1979년 처음 만났습니다. 서씨는 부조니 국제 콩쿠르에서 상위 입상하고, 샛별로 주목받던 스무 살이었습니다. 눈부신 핑크색 드레스를 맞추며 “가슴 부분을 좀 더 파달라”고 했던 팽팽한 젊음이었습니다. 80년대 이후 둘은 별다른 왕래가 없었습니다. 서씨는 뉴욕에서 두 아이를 혼자 키우며 인내를 배웠습니다. 연주자 경력 또한 욕심대로 풀리지만은 않았습니다. 30여 년 동안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홀로 달래고 그가 돌아왔습니다. 유방암으로 33번의 방사선 치료와 대수술, 8번의 항암치료와 싸워 이겼습니다. 이날 다시 만난 두 시간 동안 서씨는 말에 울음이 섞여 종종 머뭇거렸습니다. 앙드레 김은 별말 없이 눈물 닦을 휴지를 건넸습니다. 위로 대신 찬사의 말로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앙드레 김(이하 김): 어머님은 안녕하시죠?

서혜경(이하 서): 네, 여전하세요.

김: 아버님께서도 안녕하시죠. 그때가 고등학교 때였어요?

서: 대학교 때죠.

김: 미국에서 콘서트하실 때, 그때가 대학생이세요? 정말 근데 어떻게 그렇게 얼굴이 팽팽하고 프레시하고 아름다우세요.

서: (웃음)감사합니다. 선생님도 그러신데요.

김: 줄리아드에서 시작했나요? 그때 어머님의 헌신적인 사랑 듬뿍 받으시면서, 요즘도 그렇게 잘 해주세요?

서: 요새는 어머니가 아마추어 합창단을 만드셔서요. 직접 예술의전당 무대에 서세요. 환갑 넘어 노래를 시작하셔서 아리아도 하세요, 이젠.

김: 오, 오페라 아리아. 그 당시 어머님이 대단히 섬세하시고 열정이 굉장하셨어요.

서: 저희 아버님은 검소하셔서 피아노만 잘 치면 된다고, 평상복 입고 연주 잘하면 더 박수받는다는 주의였어요. 어머니는 “티켓 사서 구경 오는 사람 위해서라도 의상까지 잘하는 게 우리 의무다” 그랬죠.

김: 아버님도 따님을 끔찍이 사랑하셨잖아요. 지금도 아버님 활동하세요? 회사가 건설 관계사던가요?

서: 아뇨, 성원제강요.

잘 울고 많이 웃으며 감정에 충실한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예리한 질문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던 최고의 디자이너를 파안대소케 했다. 울고 웃기를 거듭한 둘의 대화는 두 시간이 넘게 이어졌다.[박종근 기자]

※서씨의 아버지는 성원제강의 서원석(83) 회장이다.

김: 모두 몇 남매세요?

서: 다섯 남매예요. 제가 큰딸이고요. 막내 동생이 바이올린 해요. 바로 밑 여동생은 하버드대 나와서 건축과 교수 하고요.

김: 굉장하네요. 미국에 처음 랜딩했을 때가 몇 살이에요?

서: 열넷…. 열다섯이던가. 너무 외로웠어요. 막연히 세계적으로 될 거라는 생각만 가지고…. 근데 또 피아노 치려면 혼자여야 되고. 그래서 외로움과 고독함에 대해 많이 생각을 했어요. 그전에 어렸을 때는 북한 새벽별보기 운동처럼 피아노 연습을 했어요. 하루에 8시간, 10시간. 화장실 가면 엄마가 쫓아오고요. 빨리 나오라고.

김: 하, 그 시간까지도 아꼈어요?

서: 그리고 저녁은 김밥을 입에 넣어주고요.

김: 아기들은 몇 살, 몇 살이에요?

서: 늦게 낳았어요. 그래서 이제 대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이에요. 딸 하나, 아들 하나.

김: 아, 너무 이상적이네요.

서: 마리아 칼라스의 전기를 읽다가, 아기 낳지 않은 걸 후회하는 구절이 굉장히 와닿더라고요. 그래서 마흔 되기 전에 낳아보려고 했어요.

김: 오우, 너무나 너무나 현명한 판단이셨어요. 아기가 소중한 거죠. 아기들은 다 미국서 공부하죠? 한국말도 해요?

서: 네, 우리 아들은 청학동까지 세 번 갔다 왔어요. 아시죠? 지리산에….

김: 그럼요. 클래시컬, 베리 트래디셔널.

서: 딸은 태권도가 검은띠예요. 예쁘고 똑똑하고 강해요. 독립적이고 마음이 깊어요.

김: 어머니처럼 아름다우면서 강하네요.

서: 애 둘을 혼자 길렀거든요. 제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

김: 어머님은 미국에 자주 안 가세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작은 소리로) 그때 조금 어머니와 갈등이 있으셨잖아요. 이제 다 지났죠?

서: 연주자로 그만큼 고생했으니 이제 좀 편하게 살라고 그러셨죠. 제가 계속 하니까 화가 나신 거예요. 그런데 이젠 엄마도 독립적이 되셨죠. 자신의 삶이 있죠. 환갑 넘으면서 그렇게 선언하셨어요.

김: 그럼 서 교수님 스케줄을 봐주시는 다른 분이 다 콘서트, 리사이틀 다 연락 받으시죠? 연주 제의 오는 걸 다 할 수는 없을 거예요.

서: 매니저가 해주죠. 그리고 제가 아픈 후로는 무리하지 않으려고 해요. 3년 전에 수술했잖아요. 나은 후론 많이 조절을 해요. 그런데 이번 7월에는 평생 하고 싶었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전곡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녹음해요. 다섯 곡 전부요.

김: 처음이죠, 한국 피아니스트로는?

서: 한꺼번에 하는 건 처음으로 알고 있어요. 경제적인 사정도 있고 여러 가지 때문에 미뤘어요. 유방암으로 다 잘라내고 긁어내고, 피아노 못 친다고 했어요.

김: 그런데 해냈어요?

서: 방사선 치료 끝나고 석 달 후에 예술의전당에서 연주했어요. 사람들이 홀에 가득 모인 상상을 하면서 준비를 해서 끝내 해냈어요.

김: 정말 신께서 도와주셨어요.

서: 네, 선생님과 이렇게 인터뷰할 수 있게요. 수술하고 연주도 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대부분 할 생각들 안 해요. 무리하면 임파부종이라고 팔이 퉁퉁 부어요.

김: 아니, 오른쪽 가슴이었어요?

서: 네, 오른쪽이었어요.

김: 그런데 부어요? 여기 팔까지 다? 그런데 어떻게 뺐어요?

서: 저는 안 왔어요 다행히. 영원히 안 오길 바라고요. 그래도 피아노 치면서 굉장히 힘을 많이 쓰면 신경이 쓰여요.

김: 근데 피아노 치는 순간은 억지로 한 게 아니라 의욕적으로 너무나 기쁨에서 한 거죠.

서: 피아니스트로 다시 사는 게 제가 다시 사는 것만큼 중요했어요. 그냥 생명만 살리면 서혜경이 아니잖아요.

김: 아, 정말 아기들이 충격이 컸겠어요.

서: 한 번은 뉴욕에 갔는데 머리가 훌렁 다 벗겨지니 애들이 감당을 못 하더라고요. 제가 너무 외롭고 아이들이 보고 싶었는데 그냥 한국에 많이 있었어요. 애들이 꾸준히 자기 길을 걸어야 되는데 엄마가 아프다고 부담 주긴 싫었거든요.

김: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해 주셨군요. 이제는 30년, 40년 멋지게 사실 거예요. 우리 서혜경씨는 폭넓은 남성 이상의 마음이 있어요. 어릴 때부터 깊고 아름답고 열정이 가득 차 있었어요.

서: 아들이 저를 닮아 속을 좀 썩이는데, 저를 아팠던 엄마로 생각 안 하고 정상인 엄마 대하듯 속 실컷 썩이는 것도 오히려 고마워요.

김: 아기들 어릴 때 시간을 같이 많이 보내셨어요?

서: 제가 큰딸 낳고 피아노를 3년 동안 못 쳤어요. 모유도 2년 먹이고요. 아이들을 혼자 키우면서 금전적으로도 힘들고, 피아노도 못 쳤어요. 제가 30대 시절을 그렇게 보냈어요. 10년을요!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함) 그때 제 명성이 많이 없어졌던 것 같아요. 그래도 선생님, 저 다시 일어나서 이만큼 여기까지 왔잖아요.

피아노 연습하는 게 지겹고 징그럽고 힘들어서 그냥 그만둘 생각도 했어요. 왜 제가 예전에 선생님한테 왕후 같은 드레스 부탁 드렸던 적 있죠. 대단했잖아요. 금장식도 있고. 그때 그 옷 입고 마지막으로 연주하고, 피아노의 여제로 무대를 떠나려고 했어요. 그때 선생님 오셨죠? 근데 결국 도저히 못 떠나고, 12년 전에 경희대 교수 되고 뉴욕·서울 오가면서 애 보고, 암에 걸릴 수밖에요.(웃음)

김: 대단하세요. 언젠가는 자서전 멋지게 쓰실 거예요.

서: 연주자의 길을 지키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교수 된 후에는 ‘세계 무대에서 연주할 사람이 왜 캠퍼스에 있나’ 싶어서 비 오면 울고 다녔어요. (목이 메어 말을 멈춤) 그런데 고독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고, 긍정적인 감정이더라고요. 예술가에게 꼭 필요하기도 하고요. 외로움은 당하는 것, 엄습하는 감정이에요. 외로움을 고독으로 바꾸기 위해 엄청 노력했어요. 피아노의 길을 지키기 위해서요.

김: 그럼요, 충격이죠. 힘들었죠.

서: 근데 선생님도 역경이 많으셨을 텐데.

김: 그냥 진실되게 열심히 일해야 되겠다 생각해요. 억울한 걸 느꼈을 때 그럴수록 더 열심히 몰두해야겠다고 생각해요.

서: 저도 그래요. 선생님, 다음 달에 작은 독주회를 하고, 10월 9일 예술의전당에서 차이콥스키 협주곡 1번 협연하는데 꼭 초대하고 싶어요.

김: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콘체르토 넘버 원, 전 너무 좋아요. 아버님·어머님과 사랑하시고 아드님 따님에게 헌신적인 것 멋져요. 너무 잘하셨어요.

서: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선생님.

글=김호정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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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잠깐 앉아봐요. 내가 꼭 쳐주고 싶은 곡이 있어서 그래.”

지난해 여름, 서혜경은 인터뷰를 끝낸 기자를 붙잡았다. 경희대의 교수실이 공연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드뷔시를 연주했다. 기자는 졸지에 티켓도 사지 않고 음악을 감상했다. 서혜경의 즉흥 행동은 처음이 아니었다. 2년여 투병한 후 암을 완치하고, 재기 음악회를 앞둔 2007년 겨울이었다.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가 갑자기 일어나 벽에 착 붙었다. 민첩하게 오른팔을 번쩍 들어 벽에 더 바싹 붙었다. 그리고 큰 소리로 하는 말. “이것 봐요, 이제 된다니까. 아플 땐 이게 안 됐거든요!”

서혜경은 감정에 충실하다. 잘 울고, 많이 웃는다. 피아노 연주도 그렇다. 1980년대 ‘삼익피아노’ TV 광고를 기억하는 이라면 서혜경의 라흐마니노프도 기억할 것이다. 정신 번쩍 나는 협주곡 2번의 피날레를. 거대한 오케스트라 음량조차 답답하다는 듯 성큼성큼 뚫고 나가는 건반의 강렬함을. 많은 팬을 거느린 이 연주 스타일은 서혜경 인생의 우여곡절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타고났다고밖에 할 수 없는 솔직한 성격이 잘 바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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