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그때 오늘

‘철기 장군’ 이범석, 부산 정치파동으로 권력에서 멀어지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1950년 3·1절 기념식에 참석한 정치인들. 앞줄 왼쪽부터 임영신 상공부 장관,윤치영 내무부 장관, 이범석 국무총리, 신익희 국회의장. [중앙포토]

1952년 5월 25일 이승만 대통령은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의 23개 시·군에 계엄을 선포했다. 일부 산악 지역의 빨치산 활동을 제외하고, 임시수도였던 부산을 포함해 전라남북도는 전투 지역으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갑작스러운 계엄 선포는 국민들뿐만 아니라 한국을 도와주던 유엔과 미국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기실 이 사건은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했던 국회와 직접선거로의 개헌을 통해 권좌를 계속 지키려 했던 이승만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인해 발생했다.

갈등은 1951년에 있었던 김준태 의원 구속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등으로 인해 시작됐다. 이승만은 자유당을 창당하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국회 내에서 자신의 힘을 강화하려 했지만, 자유당은 원내와 원외로 나누어졌고, 원내 자유당은 오히려 내각책임제 개헌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이에 이승만은 계엄을 통해 국회를 해산하고 대통령을 국회가 아닌 국민이 직접 선거하는 방식으로 바꾸려 했던 것이다.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의 서막이다.

미국과 유엔군에 참여한 국가들이 사태를 좌시하지 않았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유엔군이 결성됐지만, 그들이 지키려는 국가에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과 유엔은 이승만에게 계엄 해제를 요구했고, 군 일부를 동원해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끌어내리려는 계획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계획에는 이종찬 참모총장과 함께 박정희도 개입돼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미국은 이승만을 권좌에서 몰아내는 계획을 추진하지 못했다. 그를 대체할 수 있는, 믿음직한 지도자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신 미국은 이승만 주위의 강경파들을 몰아냄으로써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다. 정치파동의 주역으로 이범석(1900~1972)과 족청(민족청년단) 계열의 인물들을 지목했다. 결국 이들은 1952년 정·부통령 선거와 1953년의 자유당 전당대회를 통해 정부와 자유당의 핵심 요직에서 물러나 외유를 떠나야 했다. 마치 미국과의 갈등으로 인해 1963년 이후 두 차례 외유를 떠나야 했던 JP(김종필)와 비슷했다. 2인자의 설움인가?

광복군 활동 이래 아호를 따 ‘철기(鐵驥) 장군’으로 불렸던 이범석은 족청 단장과 대한민국의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했고, 대만 국민당을 모델로 한 자유당 창당의 주역이었다. 그러나 부산 정치파동으로 인해 더 이상 정치의 중심에 서지 못했다. 5·16 쿠데타 한 달 전에 미국 CIA가 박정희의 쿠데타 음모와 함께 철기의 쿠데타 음모를 함께 보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철기는 더 이상 재기하지 못한 채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나야 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