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감표거부의 잔머리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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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신승남(愼承男)검찰총장 탄핵소추안의 처리 불발 과정은 '잔머리 정치'의 표본이다. 한나라당+무소속.민국당 투표→민주당의 감표(監票)거부→투표함 봉인→자동폐기 과정은 헌정사의 새로운 불명예 기록이다.

지난 주말 국회에서 표결을 끝냈는데도 상대당 감표위원이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개표가 유보된 사태는 전례를 찾을 수 없다. 게임의 룰과 원칙은 제쳐놓고 '편법과 꼼수, 변칙과 요령 찾기'에만 익숙한 우리 국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그 이후의 모습은 뻔하다. 탄핵안의 비정상적 폐기 상황이 '네 탓'이라는 책임전가 공방으로 번지고 있다.

책임의 경중을 따진다면 민주당이 떳떳지 못하다. 본회의장을 지키면서도 투표를 하지 않고, 그 후에 감표위원을 내보내지 않는 중대한 혼선요인을 제공했다.

특정 정당의 감표위원이 없는 개표의 적법성 논란을 야기한 것이다. 민주당측은 "감표는 권리이지,의무가 아닌 만큼 내고 안 내고는 우리 마음이다"고 반박하지만, 탄핵안이 통과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짜낸 편법이라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때문에 "민주당이 정말 개표를 원했다면 감표위원을 내보냈으면 됐을 것"이라는 이만섭 국회의장의 지적이 설득력이 있다. 민주당의 감표위원 없이는 개표할 수 없다는 한나라당의 요구 탓에 개표를 하지 못했다는 李의장의 태도도 자동폐기 쪽으로 몰고가려 했다는 논란을 남겨 아쉽다.

"개표하면 부결될 것을 걱정한 한나라당이 거꾸로 개표를 막았다"는 민주당의 주장도 따져볼 만하지만 파행 책임의 무게는 단연 민주당 쪽이 크다. 따라서 민주당은 개표 불발의 책임을 다른 쪽에 떠넘길 것이 아니라 감표 거부에 대한 명쾌한 해명과 사과를 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번 사태가 앞으로 국무위원 해임건의안 등 인사 관련 무기명 비밀투표에 악용될 수 있는 최악의 선례(先例)를 남긴 것에 대해 국회는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국회법에 보완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탄핵 정국의 어정쩡한 마감으로 예산안 처리가 몸살을 앓게 됐다. 정기국회(9일 종료) 이후로 본격 심의를 미뤄놓은 예산안을 다룰 임시국회 소집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민주당 지도부의 사퇴와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게 한나라당의 공세다.

한나라당이 탄핵안 개표 무산과 예산안 처리를 연계하려다 멈춘 것은 잘한 일이다. 하지만 민주당 총재직을 떠난 김대중 대통령한테까지 책임을 묻는 것은 적절치 않다.

탄핵 정국 과정에서 거야(巨野)의 한계도 드러났다. 그럴수록 한나라당은 유연한 정국관리 자세를 취해야 한다. 예산안과 정치쟁점은 분리 대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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