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로버트 라이시는 과연 좌파학자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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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1면

이 글을 쓰는 마음은 조심스럽다. 출판사의 에디팅 과정상의 실수와 이에 따른 일간지들의 서평 착오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문제의 책은 현재 경제.경영부문 베스트셀러 『부유한 노예』(로버트 라이시 지음, 김영사). 1개월 전 출간된 이 책을 놓고 나온 서평들은 예외없이 책의 서술방향을 거꾸로 짚었다. 결과적으로 오독(誤讀)가능성을 피할 수 없는 이 사안과 관련해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를 짚어보자.

뒤늦게 이 책을 읽은 뒤 기자는 일간지들의 서평 기사를 다시 훑어봤다. "신경제 풍요 속 힘든 삶 고발" "일만 있고 삶은 없는 첨단의 허상" "공룡 신경제에서 해방되는 길"…. 몇몇 일간지 제목들이다.

『부유한 노예』란 책을 신경제 비판서로 규정한 것이다. "신경제는 허구다"라는 단정적인 제목도 있다. 나머지도 그런 식이다. "넘치는 곳간에도 행복은 없다" "미 신경제 풍요 속의 힘든 삶 고발" "일만 있고, 행복은 없다" 본지도 이런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책이 신경제 비판서일까? 그렇다면 이런 대목을 살펴보자. "우리는 신경제가 가져다준 구매자 천국의 시대를 즐기고 있으며, 그 기술의 힘에 감탄하고 있다.

신경제 덕분에 엄청난 부를 순식간에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데 감동하고 있다."(3백49쪽) 또 제12장을 보면 자유주의적 신경제의 방향을 다국적 기업, 욕심 많은 경영진과 엘리트의 음모로 몰아붙이는 것에 대해 "잘못된 토론이자, 비난의 대상을 잘못 선택한 것"이라는 저자의 목소리(338쪽)를 들을 수도 있다.

이런 대목은 부지기수다. 신경제가 실업과 사회불안으로 이어질 것이란 예측은 산업혁명 시기 러다이트(기계파괴주의자)처럼 잘못된 생각(42쪽)이라는 단언까지 한다.

왜 이런 오독이 나왔을까? 우선 출판사의 전문성 부족이 지적돼야 한다. 신경제를 성공으로 규정하고 있는 원저 제목(The Future of Success)을 걸맞지 않은 『부유한 노예』로 바꾼 것부터 납득하기 어렵다.

책 표지의 카피도 그렇다. "고속 성장경제, 그 풍요의 환상 속에 감춰진 냉혹한 현실".즉 콘텐츠의 한쪽 대목을 강조한 포장이다.

실은 책의 일정 부분은 신경제가 가져다준 바쁜 삶, 냉혹해진 현실 속에서 어떻게 개인 삶의 시계바늘을 조정해갈 것인가 하는 모색을 담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결정적으로 클린턴 시절 장관직을 내놓은 저자의 일화 고백이 들어있는 서문도 이 책을 신경제 비판서로 바라보게 했을지 모른다.

사정이 그렇다 해도 책의 서술방향 자체를 뒤바꾼 건 독자들을 헷갈리게 한 실수일 수 있다. 미국의 핵심 엘리트인 저자를 좌파 학자인 양 뒤바꾼 해프닝은 그래서 생겼다.

시간에 쫓기는 서평 기자들이 책을 충분히 훑지 못했을 개연성이 크고, 그것이 의문을 낳은 것이다. 출범한 지 2년 내외인 일간지의 서평 지면이 아직은 충분한 독해, 해석된 리뷰라는 목표와 거리가 있음을 다시 일깨워주는 사례다.

그런 점에서 이번 『부유한 노예』 서평은 반면(反面)교사일 것이다. 전문성이 있는 리뷰어, 리뷰에 충분한 시간과 공간의 확보라는 북섹션의 장기과제를 다시 짚어보게 한 좋은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조우석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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