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 위기는 기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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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로마의 폭군 네로가 사망했을 때 역사가 타키투스는 열살이었다. 그는 두권의 로마사를 후세에 남겼다.

한권은 그가 태어나기 40년 전부터 10대까지의 역사를 다룬 『연대기(Annales)』고 또 한권은 네로의 죽음 이후 혼돈기 30년의 로마 목격기를 적은 『역사(Historiae)』다. 『연대기』가 그의 가까운 과거를 재생한 기록이라면 『역사』는 동시대의 증언이다.

누구나 그렇듯 역사가 타키투스도 과거에는 비교적 너그럽고 현재에는 지나치게 가혹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는 그의 시대를 이렇게 혹평하고 있다. "내가 이제부터 서술하고자 하는 것은 고뇌와 비탄으로 가득찬 시대의 이야기다.

적과의 참혹한 전쟁,동포 사이의 불화와 반목, 황제가 넷이나 비명에 죽고 로마 시민끼리 전투를 벌인 것도 세차례나 된다… 신들의 뜻이 로마인에 대한 징벌에 있다는 사실이 조짐을 통해 그처럼 명확히 드러난 시대도 없었다."(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8권 '위기와 극복'에서)

*** 위기 극복의 로마 역사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는 타키투스의 이런 평가에 대해 '노'라고 강하게 부정한다. 타키투스 시대는 분명 혼란기였지만 그 혼란 속에서도 위기 극복에 노력한 황제가 있었고 융성기라 할 5현제(賢帝)시대도 숱한 전란과 혼란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혼란과 위기 자체가 아니라 혼란과 위기를 기회로 삼아 극복하는 지도자와 시민의 능력이 국가와 제국을 더 강건히 떠받드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로마인의 역사는 '위기와 극복의 역사'라는 게 시오노 나나미의 주장이다.

우리의 지난 반세기의 역사 또한 혼란과 위기의 역사였다. 4.19, 5.16, 12.12, 5.18, 6.29, 마치 난수표처럼 얽힌 갈등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한 대통령이 망명길에 오르고 한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두명의 대통령이 감옥에 가는,타키투스의 표현대로 '고뇌와 비탄'의 시대였다.

군사독재가 사라졌나 하면 문민독재.개혁독재가 준동하고 임기 말만 되면 온갖 비리가 터져나오면서 새로운 권력 암투가 또 다른 독재를 향해 꿈틀대는 혼란과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난 30년, 40년은 고뇌와 비탄으로 가득찬 징벌의 역사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타키투스식 비관보다는 시오노 나나미식 낙관론이 더 좋다. 지난 나의 과거, 우리의 과거를 고뇌와 비탄으로만 보는 비관론보다는 위기와 극복의 역사로 보는 낙관론이 국민건강을 위해서나 국가발전을 위해 더 바람직하다.

역사란 일치일란(一治一亂)의 순환이다. 혼란을 안정으로 되돌리는 역사의 힘, 국민의 힘이 우리에게 있다고 믿기에 낙관은 막연한 희망 사항 아닌 우리의 실체라고 본다.

독재를 민주로 바꾼 6월항쟁의 시민 저력, 환란 위기를 극복할 줄 아는 국민적 힘이 왕성하게 살아 있기에 낙관할 수 있다.

지금도 위기다. DJ의 남은 임기 1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위기와 기회의 갈림길이 된다. 그러나 나는 위기가 기회로 이어질 징후를 예감하고 있다. 기왕 로마사를 말한 김에 한번 더 나가면 로마제국 황제는 두 유형이 있다.

하나는 제왕적 통치자로 군림하는 '황제'(임페라토르)가 있고 또 하나는 시민 중 No.1으로 행정에 몰두하는 '제1인자'(프린켑스)다. 성공한 황제는 프린켑스형이고 실패한 황제는 대체로 임페라토르형이다. 우리의 제왕적 대통령이 당 총재직을 버렸다는 것은 시민 중 1인자로 스스로 변신한 본보기로 꼽고 싶다. 위기를 기회로 볼 징후는 또 있다.

막강 야당 한나라당이 교원정년 연장을 스스로 포기한 일이다. 다수당의 힘을 스스로 자제하며 힘의 횡포를 거둬들인 일이다. 체면이 구겨지고 무안한 면도 없지 않았겠지만 여론에 귀기울이고 미래지향적 교육을 위해 합리적 결정을 내린 이 또한 1인자적 선택이다.

*** 낙관할 수 있는 징후들

정부가 최근 국무회의에서 결정한 두 가지 사안 또한 위기를 기회로 볼 중대한 근거다. 쌀 수매가를 동결하고 적자가 눈덩이처럼 쌓인 철도청을 민영화하기 위한 전단계로 공사를 설립한다는 결정이다.

임기 말 정권치고 말썽많고 골치아픈 문제를 해결하려들지 않는 게 역대 정권의 관행이었다. 농민과 노조측의 반대가 불 보듯 뻔하고 다음 선거에서 크게 표를 잃을텐데도 해야 할 일이라면 한다는 이 두 결정은 위기를 기회로 삼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믿고 싶다.

앞으로 남은 1년, 이 한해가 우리의 10년,1백년 장래를 좌우한다는 비장한 각오가 필요하다. 대통령.정치인.관료, 우리 모두 애국심을 갖고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내자.

권영빈 <중앙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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