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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이후 세계질서 재편' 전망] 한승주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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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9.11 테러 사건 이후 엄청난 지각변동을 겪고 있는 세계 질서는 앞으로 어떻게 재편될 것인가.

지난달 30일부터 이틀간 홍콩에서 열린 '삼역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 아시아 지역회의'에는 아시아.태평양 각국의 대표적인 석학.기업인 등 50여명이 참석,국제적 현안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회의에 참석했던 한승주(韓昇洲)고려대 교수는 "이번 테러 사태로 미국이 그간 취했던 일방주의(unilateralism)에서 상당히 벗어날 것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며 참석자들의 견해와 주장을 다음과 같이 문답 형태로 간추렸다.

-미국은 이번 테러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간의 '일방주의'를 고수할 것인가.

▶9.11 테러와 그 이후의 사태는 미국의 외교 행태에 두가지 상반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먼저 키신저 등 많은 학자는 미국의 리더십과 주도권이 더 강화되는 한편 외국 및 국제기구와의 협력 필요성을 강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다자주의(multilateralism)'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하면서도 국제사회에서의 주도권을 강화하기 위해 각종 수단을 동원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부시 행정부 초기 미사일방어(MD) 문제, 교토의정서 문제 등에서 보여준 일방주의적 접근을 계속하지 못할 것으로 관측된다. 아울러 이번 사태로 부시 행정부는 중동.남아시아 등의 지역분쟁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됐다. 미국은 소위 '부시 독트린'에서 나타나듯 "동지가 아니면 적"이라는 흑백론을 펴고 있으나 이 정책은 당장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다른 나라들에 일방주의로 비칠 게 분명하다. 미국 자신은 물론 우방국들은 미국이 '일방주의적 다자주의 (unilateral multilateralism)', 즉 다자주의적 방법으로 일방주의적 외교 목표를 추구하는 방식에 빠져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일본이 해외에 파병하는 등 '보통 국가'로 가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9.11 사태를 계기로 지금까지 해외 군사활동에 제약을 받아왔던 독일과 일본은 국내외적으로 저항을 받지 않으면서 해외에 군대를 파병할 수 있게 됐다.특히 일본은 법을 개정하면서까지 자위대를 해외에 파견하고 있다. 이를 통해 미국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자국의 국제적 위상을 제고하려는 것이다. 중국은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크게 우려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지 않고 있다. 군국주의의 부활이라기보다는 일본이 강대국들의 반열에 올라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는 셈이다.

-미국이 대량 살상무기와 관련해 이라크와 북한 등에 압력을 가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들 국가가 테러집단을 도와줄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조치로 볼 수 있다. 특히 화학.생물학.핵무기 등이 유출돼 테러집단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다. 미국은 또 이라크 같은 나라들이 알 카에다 등 국제 테러집단에 은신처 및 활동 근거지를 제공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경계하고 있다. 이는 미국 정책의 최우선 순위가 적성국들과의 화해 추구보다는 테러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과거에도 미국은 전략적 차원에서 대량 살상무기의 확산에 적극 반대해 왔다. 지금은 테러집단으로의 유출 방지라는 더욱 직접적인 목표 하에 확산 방지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 내 중국의 위상은.

▶중국은 당분간 수입보다는 수출의 급성장을 이룰 것이다. 이로써 아시아 국가의 기업들 중 상당수가 중국과의 경쟁을 견디지 못해 퇴출당할 가능성이 클 것 같다.중국은 현재 중.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제안해 놓은 상태다. 한편 '아세안+3' 회의에서는 한국.일본과 함께 동북아 3개국의 경제협력안을 제안해 놓고 있다. 중국은 교역에 있어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해외 직접투자가 중국에 집중됨으로써 특히 아세안 지역이 타격을 받고 있다. 4~5년 전까지만 해도 외국인 직접투자가 동남아로 몰렸지만 현재는 중국으로 유입되는 규모가 동남아의 배에 달한다. 한국과 동남아 각국,심지어 일본까지도 중국의 경제적 도전에 직면한 상황인 것이다.

-'아세안+3'이라는 동아시아 내 자유무역지대(FTA)의 실현 가능성은.

▶지난번 브루나이 아세안+3 정상회담에서 참가국 정상들은 동아시아 FTA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FTA는 몇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무엇보다 양자간(bilateral) FTA가 광범위한 FTA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일본과 싱가포르는 FTA 체결단계에 와 있다. 또 범세계적인 새 무역질서 창설을 선언한 세계무역기구(WTO)의 '도하(Doha) 합의'는 동아시아 FTA 등 지역적 차원의 자유무역조치의 의미를 다소 퇴색시키는 측면이 있다. 무엇보다 동아시아에서는 FTA를 추진해 나갈 만한 지도력이 부족한 상태다. 지도력과 정치적 의지의 결여가 이 지역의 FTA 창설을 어렵게 하고 있다.

홍콩=진세근 특파원, 서울=남정호 기자

사진=최정동 기자

*** '삼역위원회'란

삼역위원회(三域委員會.Trilateral Commission)는 민간 파워 엘리트들이 당면한 세계적 현안들을 논의하고 해결책을 모색하자는 취지로 1973년 결성한 기구다. 아시아.태평양, 북미, 유럽의 세개 지역 대표들이 모였다는 뜻으로 '삼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최초 발기국은 아시아 지역에선 일본,유럽에선 영국.프랑스.독일 등 7개국, 그리고 북미에선 미국.캐나다가 전부였다.

참가자도 3백명으로 제한됐었다. 73년 밀어닥친 제1차 오일 쇼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지혜 모으기'가 첫 이슈였다.

지난해 삼역위원회는 새 천년을 맞아 의미있는 변신을 시도했다. 아시아 내 파워 구조가 급변하고, 유럽연합(EU)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등장하는 등 세계사적 변화가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일본 외에 한국위원회와 오세아니아(호주+뉴질랜드)위원회를 추가하고 중국.싱가포르.말레이시아.필리핀 등을 개인 멤버로 영입했다.

그리고 첫 아시아.태평양지역 회의를 지난해 한국에서 열었다.

아태지역에 할당된 회원수도 종래의 80명에서 1백20명으로 늘었고,한국에는 11석이 배당됐다. 유럽.북미 국가도 회원국과 회원수가 늘어 현재 총회원수는 3백30명이다. 한승주(韓昇洲)고려대 교수가 아태지역위원회 부위원장, 이홍구(李洪九)전 총리가 한국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 한승주 교수는

▶1940년 출생

▶경기고.서울대 졸업

▶미국 UC버클리대 정치학 박사

▶외무부 장관(1993.2~1994.12)

▶현재 고려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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