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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25시] 일본에게 왕은 무엇인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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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로열 베이비'의 탄생을 축하하는 열기가 일본 열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이웃의 경사(慶事)를 축하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겠으나 복잡한 상념이 교차하는 것을 어쩔 수 없다. 한국의 불행했던 근대사가 떠오르는 데다 그동안 막연하게 여겨졌던 일 왕실의 존재를 새삼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일왕의 역사는 기원전 6백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무신정권이 득세했던 일본에서 일왕이 힘을 갖기 시작한 것은 1868년 메이지(明治)유신 이후다. 일제시대에는 통치권을 모두 거머쥐고 있는 신적인 존재로까지 격상됐다. 이때 일제는 이웃 국가를 침략하고 식민지로 만들었다.

태평양전쟁 이후 '주권재민(主權在民)'에 입각한 평화헌법에 따라 일왕은 신에서 인간으로 내려와 정치와는 무관한 '상징적 존재'가 됐다.

일상 생활에서도 일왕의 존재는 거의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일본 언론에서도 일왕에 관한 보도는 거의 없다.

그런데도 왕실에서 출생.부음 등 경조사가 있을 때는 대부분 국민이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거나 눈물을 흘린다. 일왕은 '일본과 일본 통합의 상징'이라고 명시한 헌법 문구가 빈말이 아님을 실감케 된다.

일본 학자들은 "일본인들이 천황을 '정신적 지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외국인으로서, 더구나 일제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본 국가의 국민으로서 일본을 휩쓸고 있는 이 엄청난 축하 열기는 '과열'로밖에 안보인다.

일본 극우세력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일왕'을 내세워 일본의 우경화를 추구하고 있다. 우익 정치인들은 '90년대의 정치.경제적 침체기가 만들어 낸 상처에서 벗어나려면 국가와 민족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올 한해 한.일 관계를 흔들어 놓았던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역사 왜곡 교과서 파문도 이런 배경에서 발생했다.

'깃발부대'라는 말도 있듯이 일본인들은 목표가 정해지면 일사천리로 따라가는 성향이 강하다. 일왕에 대한 순수한 존경심이 부지불식간에 국가 중심 집단주의로 번질지 모른다는 우려는 물론 기우(杞憂)일 것이다. 이웃 나라의 경사를 두고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는 것이 비례(非禮)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본이 그동안 좀더 성의있고 성숙한 자세를 보여줬더라도 그랬을까.

오대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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