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격동의 시절 검사 27년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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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김경회(金慶會)전 형사정책연구원장은 인천지검장 재직 시절 '부천서 성고문 사건'수사를 직접 지휘해 공권력의 부도덕성을 밝혀낸 소신파 검사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결국 권력의 압력으로 축소.은폐 처리돼 지금도 검찰의 '부끄러운 역사'로 남아 있다.

1966년부터 93년까지 27년간 검찰에 몸담았던 그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대형 사건의 뒷이야기와 검사 생활의 애환 등을 본지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 싣고 싶다며 지난 6월 원고를 보내왔다.

그러나 그는 지난 8월 지병이 악화돼 타계했다. 이에 따라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연재 사상 처음으로 유고(遺稿)를 싣게 됐다. 그가 검찰내 요직을 두루 거치며 겪은 일들과 생각들을 정리한 회고록이 검찰 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원문을 가급적 그대로 실었으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실명이 거론된 인물들의 현 직책은 본사가 확인해 표시했다.

1986년 5월 2일자로 창원지검(당시는 마산지검)검사장에서 인천검사장으로 발령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인천지검에 출근한 것은 발령 일자보다 이틀 빠른 4월 30일이었다.

"'반 독재 정부타도'를 외치는 경인지역 각종 세력들이 5월 3일 인천에 모여 대규모 시위를 열기로 되어 있으니 일찍 부임하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전임 서정신(徐廷信.전 법무차관)검사장과 차장검사는 이미 떠났고 새로운 팀들도 아직 부임하지 않는 상태여서 마음이 어수선했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근무처로 각인된 탓인지 첫날부터 인천지검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고 이곳에서의 근무가 순탄치 않을 것 같은 예감이 자꾸만 들었다.

인천시내는 벌써 폭풍전야 같은 분위기였다.주요 기관장들을 인천시청으로 소집한다는 연락을 받고 갔더니 마치 작전지휘본부 같은 것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당시 인천시장은 치안본부장을 지낸 朴모씨, 안기부 인천지부장은 車모씨, 보안대장은 지금 잘 기억이 나지 않고 인천지역을 관할하던 경기도경 국장은 내가 광주지검 장흥지청에 근무할 때 강진서장을 지낸 劉모씨 였다.

드디어 5월 3일이 되었다. 인천시내 전역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서울에서 오는 전철은 만원이었고 시내 곳곳은 시위참가자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룬 상태였다. 검찰청이 있는 남구 주안동 성당 근처 거리는 대학생 등 시위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떠들썩해 앞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을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반정부 세력들이 인천을 '해방구'로 만들겠다는 계획이 있다"는 경찰 정보보고도 올라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한판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러나 경찰 출신 시장과 다른 기관장들은 걱정을 하면서도 경찰의 데모 진압능력을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의 육감은 그렇지 않았다. 더구나 늘 반정부 투쟁의 무대로 사용하던 서울을 비껴 가까운 인천을 집결지로 선택한 반정부 인사들의 절묘한(?) 선택이 걱정스러웠다. 게다가 당시 전두환(全斗煥)정권은 어떠한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군 병력을 동원하지 않고 경찰력만으로 사태를 진압하겠다는 방침이었고 또 그렇게 해왔다.

아닌게 아니라 5월 3일의 시위는 그 규모로 보나 조직력으로 보나 대단했다. 도심지 대부분이 마치 시가전을 치른 듯 폐허처럼 변했다. 며칠이 지나도 가로수와 길바닥에 배어 있는 최루가스 냄새가 없어지지 않아 마스크를 하지 않으면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인천시청 등 당국은 "데모로 인한 피해를 국민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면서 2~3일간 청소를 하지 않아 최루가스 냄새는 오래갈 수 밖에 없었다.

<정리=이상언 기자>

*** 故 김경회 원장 약력

▶1939년 경남 마산 출생

▶마산상고.부산대 법대 졸업

▶62년 고등고시 사법과 14회 합격

▶서울지검 공안부장

▶마산.인천.부산.서울지검장

▶대검 중수부장

▶대구.부산고검장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

▶2001년 8월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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