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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카불] 이상언 순회특파원 현지 3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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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커다란 눈동자가 인상적인 샤미드 하키오르(21.여)가 탈레반이 물러간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국립 보건전문학교에 복학서류를 내는 것이었다.

백의의 천사가 되겠다는 희망으로 간호학과에 다니던 그녀는 탈레반 치하 5년간 접어둘 수밖에 없었던 꿈에 다시 부풀어 있다.

탈레반은 여성에 대한 교육을 전면 금지했기 때문이다. 복학 일주일째인 28일 아침. 첫 수업은 조산술이다.

하키오르를 포함한 8명의 여학생들은 교과서 한 권을 돌려보며 임신과 출산 과정에 대해 공부했다. "탈레반 시절에는 남학생들 수업시간에도 생식기에 대한 설명은 금기였다"며 교사 사이드 카멀(40)은 여학생들을 다시 가르치는 게 마냥 즐거운 듯했다.

탈레반이 물러난 카불에는 시민들을 옥죄던 금기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세계가 서서히 열리고 있다. 카불 시내의 외국인 전용숙소 인터콘티넨털 호텔의 서점에선 9.11 테러 사태 이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아슈메드 라시드의 『탈레반』등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금서였던 책들이 서가의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다.

책방 주인 샤 무하마드(56)는 "카불에서 탈레반이 퇴각하자마자 비밀 창고에 감쳐뒀던 이 책들을 꺼내왔다"면서 "탈레반 집권 5년 동안 수천권의 책을 압수당하는 바람에 생계 유지도 어려웠다"고 회상했다.그는 요즘 외국 보도진에게 하루에 1천달러어치 이상의 책과 지도를 파는 '특수'를 누리고 있다.

서울의 청계천을 연상케 하는 플레헤시티 거리의 전자제품 상가는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사기 위해 몰려나온 주민들로 넘쳐난다. 탈레반이 카불에 입성한 지 이틀 만에 끊어졌던 TV 방송이 비록 하루 서너시간뿐이지만 재개됐고 라디오에선 흥겨운 노랫가락이 다시 흘러나오고 있다.

탈레반 시절 '헤와드'로 이름을 바꿨던 관영 일간지는 '아니스'라는 본래 이름을 되찾아 북부동맹의 승전 소식을 연일 머리기사로 싣고 있다.

새로운 변화의 물결에는 탈레반이 극도로 혐오했던 상업주의도 편승해 있다. 선정적인 장면들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인도 액션영화를 보여주는 비디오방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카불 시내에서만 벌써 수십곳이 성업 중이다. 가슴을 드러낸 여배우의 포스터가 잔뜩 붙어 있는 비디오방은 5천 아프가니(약 3백원)를 내고 입장한 청소년들로 만원이다.

물건을 사려는 주민들이 시장으로 몰리면서 연일 물건 값이 오르고 있고 파키스탄 루피화와 달러가 쏟아져 들어와 환율이 일주일 새 10% 이상 떨어졌다.

시민들은 하루가 다르게 탈바꿈을 거듭하는 카불의 새 모습을 즐기고 있다. 종교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인간의 욕구를 지배하려 했던 탈레반의 시도가 실패로 끝난 것이다.

카불=이상언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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