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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원더풀 라이프' 일본 고레에다 감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솔직히 쇼치쿠(松竹).도에이(東映).도호(東寶) 같은 일본의 대형 영화사는 망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경쟁이 가능하죠. 전국의 복합상영관(멀티플렉스)을 통해 할리우드의 요란한 영화만 틀어대는 관행으론 미래를 기약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배급사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죠. 감독이 이래라 저래라 말할 성격은 아니지만 작은 영화라도 극장과 관객을 연결시켜 주려는 배급사의 발상 전환이 시급합니다."

일본의 젊은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39)가 또박또박 의견을 밝혔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소신은 확고했다. 다음달 8일 개봉하는 '원더풀 라이프'를 들고 한국을 찾은 그는 "영화 유통의 개선만이 현재 상업.작가영화의 이원화가 극심한 일본 영화계를 살릴 길"이라고 강조했다.

각본.감독.배급.홍보 등을 혼자 책임지는 1인 시스템을 유지하면서도 세계적으로 지명도를 높이고 있는 고레에다 감독. 일본 영화계는 1990년대 이후 산업적으로 후퇴하고 있지만 그의 뼈있는 지적은 한국영화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타산지석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는 "한국 감독 중 내면의 긴장감이 살아있는 홍상수 감독을 가장 좋아한다"며 "수백개 스크린에서 짧은 기간 상영하는 것보다 극장수는 적지만 오랫동안 보여주는 게 영화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체력과 근성이 있는 배급사가 한 감독의 역량을 장기적 시각에서 평가하고, 그래서 다음 세대에게도 영향을 주는 감독을 길러내야 영화계의 기초가 튼튼해진다는 주장이다.

1995년 '환상의 빛'으로 데뷔한 그는 98년 부산영화제에서 '사후(死後)'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원더풀 라이프'와 올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디스턴스(Distance)' 세 편으로 지명도를 쌓은 감독.

작품수는 적지만 세계의 많은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으며 90년대 일본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성장했다. 젊은 감독답지 않게 삶과 죽음, 기억과 현실의 문제를 담담하고 침착하게 풀어간다.

'원더풀 라이프'는 이중 가장 대중성이 강한 작품. 이미 죽은 사람에게 살아있을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하나 고르라는 독특한 발상을 앞세우면서 생사(生死)의 심각한 문제를 따뜻한 감성으로 엮어나간다. 청소년부터 노년층까지 다양한 남녀노소를 등장시키며 행복의 참뜻을 묻고 있다.

특기할 점은 영화 제작.배급의 전과정을 그가 이끌고 있다는 점. "대형 영화사의 스카우트 제안이 없었느냐"고 질문하자 "물론 있었죠. 하지만 캐스팅.작품 성격 등에 간섭을 받고 싶지 않아 솔로를 고집했다"고 말했다. "그러면 영화 만들기가 너무 어렵지 않으냐"고 되묻자 "그래도 운이 좋았다. '디스턴스'를 제외하곤 수익을 맞출 수 있었다"고 대답했다.

예컨대 '원더풀 라이프'는 20세기 폭스에서 구입한 리메이크 판권만으로 제작비를 회수했다고 했다. 또 20여개국에서 상영되는 성과를 올렸다고 덧붙였다. 세편의 평균 제작비는 1억엔(약 11억원)에 그쳤고, 모두 단관 개봉했지만 결과는 양호한 편이라는 것.

하지만 7~10개 극장에 개봉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기에 더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그리고 한국 영화계도 이런 제도적 측면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그는 '정치적으로도 올바른'감독으로 보였다. 일본에서 차별받는 재일동포의 굴절된 삶을 TV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던 그는 "일본이 가해자였던 사실을 절대 잊으면 안된다"며 "전후 오직 돈을 향해 매진했던 일본인들이 거품 경제가 꺼지자 예전의 군국주의에서 위안을 찾는 게 부끄럽고 위험스럽다"고 비판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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