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노트북을 열며] 신정국가 미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폭격했던 주요 나라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1945년)-한국(50년)-과테말라(54.67)-인도네시아(58)-쿠바(59)-베트남(61)-콩고(64)-라오스(64)-페루(65)-캄보디아(69)-그레나다(83)-리비아(86)-파나마(89)-이라크(91)-보스니아(95)-수단(98)-유고슬라비아(99)-아프가니스탄(현재.일부 중남미국가 제외).

*** 평화 외치며 아프간 공습

'작은 것들의 신(神)'으로 유명한 인도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영국신문에 쓴 글에서 미국을 "지치지 않는 나라"라고 꼬집었다. 확실히 미국은 지치지 않는 정열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이끌어온 나라임에 분명하다. 그런 맥락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슬람 원리주의보다 미국을 더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최근 계간지들이 미국을 분석하는 글을 싣는 것도 그런 필요성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미국인들의 깊숙한 심성, 특히 위기국면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종교적 가치관으로 현사태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주목된다.

예컨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습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부시 대통령이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라고 천명했다. 이런 모순은 종교적으로 설명 가능하다는 것이다. '알라'를 외치며 자살테러를 감행하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을 이해하는 열쇠가 종교이듯 일부에선 "세계무역센터 테러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미국의 교회"라고 한다.

테러 이후 많은 미국인들이 교회로 돌아오는 현상을 빗댄 말이다. 주일예배 참석자가 이전보다 3~4배 늘고, 술집과 영화관을 찾는 발길이 줄었다고 한다.

또 일부에선 "테러는 신앙적.도덕적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채찍"이라며 신앙심의 회복을 주창하고 있고, 또 성급한 일부는 '신(新)청교도주의 시대'의 도래를 반기고 있다고 한다.

'청교도(Puritan)'. 바로 미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종교다. 청교도는 매우 근본주의적이고 원칙주의적이다. 캘빈의 장로교 중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열성적인 일파다. 캘빈은 가톨릭을 가장 철저하게 비판하고 개혁하고자 한 종교개혁운동가다. 다시 말해 청교도는 개신교 중에서 가장 근본주의적인 성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가르침이다. 법률가 출신 캘빈은 엄숙주의자.도덕주의자다. 그의 리더십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하나님의 나라를 현실에 구현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다. 다시 말해 신정(神政)국가의 건설이다.

실제로 캘빈은 16세기 중반 스위스 제네바의 지도자로서 10여년 신정국가의 이상을 현실에 적용했다. 술집을 모두 없애고, 이단자를 화형시키는 공포정치를 폈다. 그 신학적 배경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다"는 주장이다. 동양의 성악설, 법가사상을 연상시킨다.

캘빈의 정신을 가장 철저하게 이어받은 사람들이 곧 미국을 만든 '건국의 아버지들(Pilgrim Fathers)'이다.(경성대 권용립 교수가 『당대비평』 겨울호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그들이 타고 간 메이플라워호는 '노아의 방주'며, 그들이 도착한 신대륙은 '부름받은 광야'며,미국은 구원을 약속받은 '신세계의 이스라엘(New World Israel)'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구약에 따른 선민(選民)이라면, 미국인들은 프로테스탄트 선민인 셈이다.

*** 선민의식과 청교도 정신

이같은 생각은 이민 초기 보스턴을 중심으로 한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지배적이었고, 지금도 그같은 선민의식과 청교도정신은 미국의 지배층(WASP.앵글로색슨계 백인 프로테스탄트)에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진단이다. 테러라는 위기국면에서 그같은 가치관은 미국사회 전반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아프가니스탄 폭격은 신성한 나라의 평화를 깬 악(惡)을 응징하는 십자군운동이다. 무슬림들이 "우리 피는 싸구려가 아니다"고 아무리 외쳐도 들리지 않는 이유다.

오병상 문화부 차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