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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관령의 중공군 (93) ‘티 타임’의 군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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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6·25 전쟁에 참전한 영국군 기갑부대원들의 모습이다. 1951년 1월 중공군의 공세를 앞둔 시점이다. 오른쪽 뒤의 인물이 목에 두르고 있는 실크 스카프는 당시 영국 기갑부대 장교들의 애용품이었다. 미 NBC의 전설적인 종군기자인 존 리치(92)가 당시 찍은 사진이다. [연합뉴스]

영국군은 미군에 비해 행동이 점잖다. 비가 줄줄 새는 국군 천막을 방문한 미국과 영국 장교는 몸가짐부터 서로 달랐다. 미군 장교는 반드시 마른 자리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영국 장교는 그러지 않았다. 젖은 자리라도 자기가 앉아야 할 곳이라면 그대로 앉았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소박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국 전선에 뛰어든 영국군은 베레모를 잘 쓰고 다녔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장면은 그들의 휴식 시간이다. 1951년 중공군 공세로 밀렸던 ‘1·4 후퇴’ 당시 우리는 남쪽으로 밀리는 과정에서 영국군 포병의 지원을 받은 일이 있다. 그때 나는 그들의 잘 이해되지 않는 휴식시간을 직접 목격했다.

그들은 오후 4시가 되면 포격을 중지했다. 이상할 정도로 그들이 즐겼던 ‘티 타임(tea time)’이 바로 그때였기 때문이다. 오후 4시쯤 되면 차를 나눠 마시면서 하루를 정리한다는 영국인들의 일상적인 생활 속의 습관 말이다. 분명히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때였는데도, 그들은 그 시간이 되면 차를 끓인 뒤 쿠키 등 과자류를 들고 참호 속에 들어가 앉아서 이 휴식 시간을 즐기는 것이었다. 물론 전투 중이라도 어느 정도 상황이 괜찮았으니까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교전 중인 상황에서도 어쨌거나 차를 끓이고 담소를 나누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어떤 여유를 느꼈다.

미군이 사단 중심으로 부대를 구성하는 것에 비해 영국군은 주로 화력을 강화한 여단 중심으로 군대를 운영했다. 정확하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한때 광역(廣域)의 식민지를 비교적 적은 병력으로 운영했던 제국(帝國)의 군대 전통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성실하게 전투에 임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전쟁과 관련된 모든 일에는 신중하면서도 진지하게 대했다. 특히 그들은 방어에 강했다. 어느 곳을 지켜야 한다는 명령이 떨어지면 죽음으로써 그곳을 지키는 우직함이 돋보이는 군대였다. 대신 그들은 절대 전투를 호탕하게 하지 않았다. 즉흥적이거나, 일시적인 감정에 쏠리는 싸움은 절대 벌이지 않는 것이다. 책임과 의무라는 의식에서 영국군은 미군을 비롯한 어느 다른 군대보다도 강했다. 내가 직접 본 바로는 그랬다.

영국군이 포병대를 구성하는 방식이 그 좋은 예에 해당할 것이다. 보통 포병대에는 관측장교가 있다. 포탄 탄착지점을 미리 측정하는 사람이다. 관측장교는 일단 전방으로 먼저 나가야 한다. 적과 가까운, 높은 고지에 올라 아군이 어느 지점으로 포격을 할 것인가를 미리 관측해야 한다.

그래서 임무가 무겁다. 아울러 적진(敵陣) 가까운 지역으로 파고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다른 어느 부대원보다 위험에 크게 노출된다. 미군은 그런 관측장교를 포대장이 아닌 다른 하급 장교에게 맡긴다. 영국은 반대다. 가장 중요하면서, 가장 위험한 직무를 포대장인 포병 중대장이 직접 맡는 게 전통이다.

중공군이 몰려오는 것을 고립된 진지에서, 그것도 칠흑 같은 밤에 맞이했던 영국 글로스터 연대 1대대는 정말 용감하게 싸웠다. 그중에서도 유명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보통 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아군이 가장 지겨우면서도 겁을 집어먹었던 것은 중공군의 피리 소리였다. 어두운 밤 저 컴컴한 곳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피리소리는 심리적으로 집요하게 아군의 마음을 흔들었다. 부대원들이 넌덜머리를 치는 일이 잦았고, 그 때문에 사기(士氣)가 떨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고립된 글로스터 연대 1대대는 다가오는 중공군들을 향해 거꾸로 나팔을 불어댔다고 한다. 자신들의 힘찬 군가를 비롯한 여러 곡조를 나팔로 힘차게 불면서 피리 소리로 심리전을 펴오는 중공군에 맞섰다는 것이다. 글로스터 부대원들의 일부는 고립의 막바지였던 51년 4월 24일 저녁 무렵, 집에서 온 편지 등을 마지막으로 읽은 뒤 전투에 임했다고 한다. 그리고 탄약을 마지막까지 소진하면서 다음 날의 아침 해를 맞이했다고 당시의 상황을 취재해 기술한 책 『마지막 한 발』의 저자 앤드루 새먼은 적고 있다.

어쨌든 영국군은 충분히 조직된 군대였다. 그리고 다른 나라 군대의 일반 군인처럼 자신의 목숨을 아끼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의무와 책임이라는 의식으로 무장해 과감하게 전투에 앞장서는 군대였다.

중공군이 한국군을 집중적으로 겨냥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우선 화력이 미군이나 영국군에 비해 뒤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싸움을 이어갈 만한 튼튼한 조직력과 결집력에서 이미 미국과 영국의 군대에 뒤져 있었던 것이다. 중공군이 걸어오는 싸움에서 국군은 여러 차례 약점을 보이면서 무너졌다. 내가 쓰라린 6·25전쟁을 회고하는 이 마당에서도 국군이 허무하게 패배했던 장면에 관한 묘사를 피할 수 없다. 그만큼 국군은 허약했고, 중공군의 타격에 쉽게 무너지는 일이 잦았다.

그것은 사람이 약해서 벌어지는 게 아니었다. 그 사람을 묶어줄 조직력의 부재가 더 큰 문제였다. 체계적인 훈련이 부족했던 것도 함께 지적해야 한다. 우리는 강한 군대가 되기 위한 결정적인 몇 가지 조건을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봄과 함께 시작된 중공군의 공세에 노출된 국군의 크나큰 약점이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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