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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묻은 돌미나리ㆍ부추ㆍ취나물...시장 할머니 함지박은 ‘봄 선물세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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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호 09면

제철 음식을 만나는 가장 중요한 장소는 바로 재래시장, 그중에서도 5일장이다. 봄의 재래시장과 5일장에서 눈여겨볼 것은, 그 지역 할머니들이 이고 나오는 함지박 물건들이다. 비닐 하나 깔아놓고 수북수북 쌓아놓은 돌미나리·부추·취나물, 혹은 배추와 상추 솎음들, 그런 것들이야말로 대도시에서 카트 끌면서 쇼핑하는 대형 매장에서는 절대로 만날 수 없는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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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의외로 젊은 층들은 재래시장, 특히 이렇게 바닥에 수북이 쌓여 있는 벌크 형태의 야채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재래시장에서는 많은 사람 속에서 밀려다니다 보면 차분히 구경할 수가 없고, 물건을 만지작거리다 장사하시는 아주머니들한테 야단이라도 맞을까봐 두려운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벌크로 쌓여 있는 야채도 어쩐지 지저분하고 찌꺼기 같아 보이고, 그저 수북하게 쌓여 있기만 해서 뭐가 뭔지 알아보지 못하니 건드려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단정하게 단으로 묶이고 스티로폼과 비닐 랩으로 깨끗하게 포장돼 제품의 이름과 가격까지 라벨로 붙은 야채만 사게 된다.

그런데 이런 대형 매장의 포장된 야채들, 혹은 재래시장에서라도 묶음으로 단정하게 쌓여 있는 야채는 산지에서 전문적으로 생산돼 박스에 담겨 도매시장으로 옮겨지고, 거기에서 다시 소매로 옮겨진 것이 대부분이다. 유통 과정이 긴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지점이 있다. 외양에서 상품성이 떨어진다 싶은 야채, 긴 기간의 유통을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여린 야채는 과감히 제외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봄에 만나는 이런 야채는 대개 겨우내 온실에서 키워낸 것이다. 흙바람을 맞지 않았으니 깨끗하고, 겨울부터 키웠으니 초봄부터 튼실하게 길쭉길쭉 잘 자랐다. 말하자면 허우대가 멀쩡한 것들만 단으로 묶이고 포장돼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야채들은 야생의 맛이 없을 뿐 아니라 의외로 질기다. 봄 야채의 맛은 초봄에 싹이 터서 나오는 그 야리야리하고 연한 맛인데, 겨우내 출하되던 뒤끝에 나오는 상추나 부추는 이미 나이가 많이 든 노쇠한 포기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함지박 할머니들은 시장의 토박이 상인한테 밀려 대개는 시장의 중심까지 진입도 못하고 변두리 한 귀퉁이에 비닐 깔고 장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 파는 종목도 몇 가지 안 되고, 양도 적다. 그런데 바로 이런 할머니들 야채에서 종종 진짜 보물이 발견된다.
엄지손가락 길이로 자란 상추 솎음, 한 뼘이나 될까 싶은 연한 배추와 열무, 이런 것들은 봄에 노지에 씨를 뿌려 키워내 군데군데 솎아낸 것들이다. 처음 씨를 뿌릴 때에는 아무래도 많이 뿌리게 되는데, 어느 정도 크면 군데군데 솎아주어야만 나머지 것들이 상품성 있게 클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솎아낸 연한 것들이야말로 봄에 먹는 제 맛이다. 작은 솎음 상추를 양념 간장에 참기름 넣어 무쳐 먹으면 얼마나 맛이 있을지, 연하디 연한 배추와 열무로 찹쌀풀 섞어 국물 김치를 담그면 그 야들야들한 맛이 얼마나 기가 막힐지, 그냥 재료만 바라보아도 입에 침이 돈다.

부추도 한 뼘이 조금 넘는 야들야들한 것들이 나오는데, 노지에서 봄에 새로 싹을 틔운 것이다. 겨울 지나 처음 나오는 부추는 ‘사촌도 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귀하고 맛있다. 5월쯤 되면 그보다는 못하지만 온실에서 겨우내 자라 거의 중국 부추를 연상시킬 정도로 굵어진 부추와는 비교할 수 없다. 부추는 멸치액젓이나 양념 간장에 무쳐도 좋고, 고추장과 간장에 설탕 약간을 섞어 무쳐도 맛있다.

지방 중소도시 시장에 가면 큰 비닐 가득하게 온갖 잡다한 산나물들을 뒤섞어 파는 것도 만날 수 있다. 이런 산나물은 100% 야생이라고 믿어도 좋다. 나물꾼들이 돌아다니며 먹을 만한 것들을 뒤섞어 채취한 것을 그대로 들고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나물이 한 종목씩 모여서 나는 것이 아니니, 뒤섞인 것이 자연스럽다. 취나물도 흙먼지 뒤집어 쓴 것들이 야생이다. 연한 것들은 그대로 쌈장에 찍어 먹고, 나머지는 데쳐 고추장이나 간장에 무쳐 먹으면 이것이 야생 산나물이구나 하는 실감을 하게 된다. 특히 취나물은 크고 깨끗하게 자란 온실 물건과는 그 향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

돌나물이나 머위처럼 초봄부터 먹기 시작했던 것들도 이제 재래시장에 가면 확실히 야생의 노지 것들을 만날 수 있다. 이런 돌나물은 온실에서 키워 도매시장을 거쳐 나온 것보다 탱탱하고 깨끗한데, 아무래도 절단면이 덜 시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돌나물은 다듬을 것도 없다.

그냥 두어 번 씻은 뒤 물에 찹쌀풀 쑨 것을 섞고 소금과 파·마늘을 넣은 후 빡빡하다 싶을 정도로 돌나물을 넣어 국물김치를 담근다. 돌나물은 으깨지면 맛이 없으므로 절일 필요도 없이 그냥 담그면 된다. 기호에 따라 고춧가루나 양파 썬 것을 넣어도 좋다. 이틀 정도면 노르스름하게 익는데, 다시 냉장고에 넣어 하루쯤 숙성시킨다. 돌나물 물김치는 열무에 비해 훨씬 연하고 특유의 야생의 맛이 있어 매력적이다.

이런 시장의 함지박 할머니는 두릅도 비교적 싸게 판다. 노끈에 묶어 파는 비싼 것보다는 다소 자잘한 것들이지만, 한 바구니에 아담하게 담아 5000원 혹은 1만원에 파는 두릅은 꽤 먹을 만하다. 살짝 데쳐 연녹색이 도는 두릅을 얄팍하게 썰어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밥상이 호사스러워진다.

물론 이런 곳에서도 주의할 점은 있다. 꽤 굵은 고춧잎 같은 것이 그런 것이다. 이제 고추는 모종을 할 철인데 굵은 고춧잎이 나온다는 것은, 겨우내 온실에서 풋고추를 키우고 난 찌꺼기다. 결국 제철 재료를 찾아 현명하게 먹고 살려면 계절과 식물에 대한 감각을 키워야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문화유산 답사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재래시장 쇼핑에서도 필요하다.


대중예술평론가. 요리 에세이 『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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