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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진압한 대장경…”‘고려사’에 기록 나와...거란족 격퇴한 증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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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호 22면

고려 때 이규보는 국왕(고종)을 대신해 작성한 『대장각판 군신 기고문』에서 ‘현종 2년에 침략한 거란의 군대가 물러가지 않으므로 군신이 함께 무상대원을 발하여 대장경판의 각성을 맹서한 이후에야 비로소 거란의 군대가 스스로 물러갔다. 고로 지금의 몽골 침략을 다시 물리치기 위하여 대장경을 고쳐 만든다’고 기록한 바 있다. 이것이 대장경 연구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일본 주장 뒤집는 연구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학자들은 한반도 식민사관을 강화하려고 고려대장경의 조성 동기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폄하했다. 상반대정(常盤大定)은 ‘외적 격퇴의 기원(祈願)은 미신적 분자가 혼입된 것’(1913년)이라고 주장했다.

지내굉(池內宏)은 고려대장경의 불교문화사·서지학·보관기술의 우수성을 인정하면서도 ‘중국 대륙의 것을 그대로 베꼈다’며 외래성과 모방성을 강조했다. 또 조성 동기가 최씨 무인 정권의 개인 차원이라거나, 현종이 죽은 부모를 위해 현화사에 장경판을 시납(施納)코자 한 것(1923년)이라며 의미를 축소했다. 이른바 ‘호랑이’를 ‘고양이’로 둔갑시킨 셈이다. 연구 시각과 방법론도 서지학이나 불교문화, 출판인쇄사에 치우쳤다. 이는 결과적으로 일제 지배에 맞서서 싹트고 있던 독립의식과 민족적 자부심을 무력화시키는 데 기여하게 된다.

일제 때 한국인 연구자들로는 이능화·권상로를 꼽을 수 있다. 우리나라 연구자들은 대부분 해방 이후에야 비로소 대장경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김두종은 ‘이규보가 기고문을 작성할 당시에는 위의 고사(故事)에 관한 확실한 문헌들이 전해졌을 것’이라며 반론을 제기했다(1974년). 그러나 역사적 진실을 직접 증명할 수 있는 정사(正史) 속의 증거 문헌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일부 국내 학자들은 일제 식민사관이 담긴 학설을 수용하거나 심지어 동조하는 입장까지 보였다. 북한의 연구자 송영종·조희성은 판각 사업의 동기를 ‘불교 교리 선전과 종교적 미신’이라고 규정했다(1990년). 의도야 다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일본학자들의 연구 시각과 일치하는 논리다.

이후 서수생·박상국 등은 재조대장경의 서지와 내용에 관해 연구 성과를 내놓았고, 박상진은 판목을 만드는 데 쓰인 나무의 재질에 관한 과학적 연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종래 판목의 재질로 알려진 자작나무는 소수에 불과하고 산벚나무를 비롯한 10여 종의 나무가 주 재료임을 밝혔다. 이는 판각의 보존·예술성과 함께 생태학적 측면도 치밀하게 배려했다는 얘기다.

90년대 이후 고려대장경연구소는 해인사 재조대장경을 전산화해 ‘디지털 팔만대장경’을 완성했다. 이것은 지식정보 사회의 욕구를 반영한 것이다. 이에 더해 남권희는 일본 남선사(南禪寺) 등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초조대장경을 추적해 디지털화하면서 서지학적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이는 고려대장경 전반에 관한 데이터베이스(DB)를 제공할 것이다.

최연주·최영호 등은 대장경 판각의 각수(새긴 이)와 인출자 등을 집요하게 추적해 판각의 과정과 참여 인원 등을 파악함으로써 재조대장경의 조성이 국민 운동으로 전개됐음을 예증했다.

재조대장경의 각 경전 후미에는 반드시 ‘갑진년에 고려 국왕의 칙령을 받들어 대장도감에서 판각하다’라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최근 필자는 이 칙령을 내렸던 고종이 당시 집권자인 최항에게 내린 글(1255년)에서 ‘초조대장경은 진병대장경(鎭兵大藏經: 전쟁을 진압한 대장경)’이라고 지적한 대목을 발견했다. 『고려사』 제129권에서였다. 국왕인 고종부터 초조대장경이야말로 거란족의 침략을 종식시켰음을 확신했다는 전거(典據)다.

정사인 『고려사』에 기록된 국왕의 문장에 거짓이 기록되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러므로 초조대장경의 조성 동기는 ‘거란이 스스로 물러가기를 기원하는 것’이었고, 재조대장경의 동기 또한 ‘몽골군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한 것임’이 확고하게 입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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