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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논쟁과 정부의 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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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20대 초반의 여대생으로서 최근의 낙태 논쟁은 피부에 와 닿는다. 이 논쟁이 주로 ‘태아의 생명 존중’과 ‘여성의 인권’의 충돌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은 아쉽다. 보건복지부가 3월 발표한 ‘불법 인공임신중절 예방종합대책’에는 강간으로 인한 원치 않는 임신,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없는 경제적 상황, 청소년들의 성관념 미숙에 의한 임신 등의 문제 요인을 해결하기 위한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정부는 불법 낙태에 대한 단속을 강화해 낙태를 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과 낙태를 해줄 수밖에 없었던 의사를 처벌함으로써 자신들의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물론 정부 대책에는 비혼(非婚) 부모에게 한 달에 약 10만원가량의 양육비를 지급하고, 원치 않는 임신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한 상담프로그램을 제공한다는 내용도 있다. 그러나 비혼 부모의 대부분인 소득이 없는 청소년들에게 10만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정부는 경제적 지원도 제대로 해주지 못하면서 낙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억지를 부리고 있는 셈이다. 상담프로그램도 임신을 ‘유지’하기 위한 상담일 뿐이다.

낙태 논쟁은 생산적으로 전개돼야 한다. 미혼이든 기혼이든 여성이 경제적 이유로 낙태를 하지 않도록 육아 환경과 경제적 지원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한 낙태와 성별 감식 후의 낙태 같은 악의적 낙태를 구분하는 기준을 세워야 한다. 청소년들에겐 피임법과 같은 실질적인 성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여성의 몸과 마음에 악영향을 미치는 낙태를 해야만 했던 여성에게 낙태는 불법이라고 처벌하는 것은 두 번 상처를 주는 것이다.

이희원 서울대 사회과학계열 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