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11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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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117. 보조국사 비판

성철 스님은 돈오돈수(頓悟頓修.단박에 깨치고,단박에 닦음)를 주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보조국사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단박에 깨치고, 점차로 닦음)를 비판했고, 거꾸로 보조국사의 전통을 따라오던 불교계 일부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같은 역비판에 대해 성철 스님은 "보조국사의 사상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며 재차 반박했다. 성철 스님의 주장은 돈오돈수의 '돈오'와 돈오점수의 '돈오'가 서로 다른 개념이라는 것이다. 돈오돈수의 깨달음(돈오)은 돈오점수의 깨달음(돈오)보다 더 심오한 경지이기에 더이상의 점진적인 닦음(漸修)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돈오(頓悟)라는 말을 겉으로 볼 때는 같습니다. 그러나 돈오돈수에서 말하는 돈오와 돈오점수에서 말하는 돈오는 '깨달음의 내용'면에서는 근본적으로 틀립니다. 보조국사가 초년의 저술에서는 확실히 돈오점수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십년후 마흔한살 때 『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고 '얻은 바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보조국사가 초기에는 돈오점수를 주장했지만 중국 당나라 시대 선불교의 고승인 대혜 스님의 어록을 읽고서는 생각을 바꾸었다는 주장이다. 보조국사는 이후 전남 순천 송광사로 옮겨가 십여년을 지낸 뒤 열반에 들었다. 그 직전해 겨울에 남긴 저술이 『절요(節要)』인데, 성철 스님은 이 책에서 사상적 전환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보조국사는 절요에서 돈오점수는 교종(敎宗)에 해당하는 것이지 선종은 아니라고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초기 저술에선 돈오점수를 달마선(達磨禪)이라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20년 후에 지은 절요에 와서는 돈오점수는 선종이 아닌 교종이라고 고쳤습니다. 초년에는 선(禪)과 교(敎)를 혼동해서 돈오점수를 선종이라고 주장했지만 돌아가시기 직전 생각을 바꾼 것이 확실합니다."

보조국사의 후반기 사상이 전반기의 잘못을 시정한 것이며, 이는 성철 스님 본인이 주장해온 돈오돈수와 같은 맥락이라는 해석이다. 성철 스님은 이같은 주장을 통해 궁극적으로 당시 돈오점수가 광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던 한국불교계의 잘못된 수행풍토를 비판하고자 했다.

"요사이 우리나라의 선방을 볼 것 같으면, 보조국사의 잘못된 초기 저작만 보고 자꾸 돈오점수를 주장하는 사람들로 꽉 찼습니다. 돈오점수를 순전히 선사상(禪思想)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보조스님을 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팔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돈오점수가 선종사상이라고 주장한다면 보조국사가 웃을 일입니다."

성철 스님은 이같이 보조국사의 생각을 잘못 이해한 돈오점수에 따르면 참된 깨달음을 담보해주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돈오점수는 선종의 이단이라는 시각이다. 나아가 보조국사에 대해서도 "보조국사가 초기 잘못된 사상을 말년에 깨닫고도 이를 정확히 바로잡지 못하고 열반, 지금까지 혼돈이 남아 있다"고 비판의 화살을 날렸다.

성철 스님은 또 돈오점수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확실히 구별짓기 위해 달리 불렀다. 돈오점수에서의 깨달음은 '알음알이(知解)'에 불과하며, 이같은 알음알이는 참된 깨달음을 이끌지 못하는 깨달음(解悟)이라고 명명했다. 다시말해 돈오점수는 잘못된 표현이고, 정확히 말하자면 해오점수(解悟漸修)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해오일 경우 궁극적 깨달음을 위해 부단한 수행을 하는 점수(漸修)가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이같은 점수의 여지를 아예 부인한다."점수가 필요한 돈오는 그것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절대로 깨달음이 아니며, 만의 하나라도 그런 것을 깨달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영원히 깨달음의 길을 등지는 자살행위"라고 주장했다. 해오 이후의 닦음은 결국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며, 이는 깨달음의 실현이라기보다 또 다른 업장을 낳을 뿐이라는 판단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성철 스님의 주장은 화두를 들고 참선에 전념, 한꺼번에 깨달음을 얻으면 더이상의 닦음(修)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까지가 중요하며, 깨달음을 얻기 위한 정진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라는 엄정한 자기관리의 가르침인 셈이다.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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