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한국영화의 사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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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쉬리'와 'JSA공동경비구역'이 경이적인 흥행기록을 수립한 후 이 기록을 깨는 영화 '친구'가 등장하고 이어 '조폭마누라' 및 '킬러들의 수다' 등 순식간에 엄청난 수의 관객을 끌어 모으는 '대박' 영화들이 연이어 극장에서 위세를 떨치게 됨에 따라 한국 영화산업의 이상한 열기에 대해 여러 가지 진단들이 나오고 있다.

*** 質높은 작품 철저히 외면

불과 3, 4년 전 미국의 정치적 압력으로 존폐 위기에 놓였던 스크린쿼터 수호투쟁을 부르짖었을 때를 생각해보면 스크린 점유율 40%를 육박하는 한국 영화의 이와 같은 약진은 당연히 환영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 증대가 질적 향상을 수반하지 못하고 오히려 역함수적 경향성마저 보임에 따라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동시에 터져 나오고 있다. 즉 한국 영화관객이 늘면 늘수록 오로지 금전적 이윤만 추구하는 '천박한' '저질' 상업 영화에만 더 몰리고 상대적으로 수준 높은, 좋은 예술 영화는 철저히 외면당해 극장에 불과 며칠 걸리지도 못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적 현상의 문화적.사회심리학적 복합원인이 무엇인지 밝혀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몇몇 표면적 이유는 분명하다.

우선 제작과 배급 시스템의 불균형이다. 극장 및 배급망을 장악한 자본이 제작의 제반 흐름을 주도하는 한국적 수직통합체제가 구축되기 시작해 그 야만적 효과가 드러나고 있다.

말하자면 몇몇 큰 물고기만 멀티플렉스 극장들의 증가로 갑자기 그 수가 늘어난 스크린이라는 먹이를 독식해 살아남고 작은 물고기들은 다 굶어죽게끔 돼 있다. 영화 소비시장의 이 불공정한 거래관행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나 제도는 하나도 마련돼 있지 않다.

이와 관련해 영화에 대한 대중적 평판이 비평적 안목에 근거하고 있다기보다 마케팅과 광고효과에 크게 좌우되고 있다. 영화평론가들의 숫자도 급속히 늘었고 이들이 발언할 수 있는 지면이나 공간도 확대됐지만 그 비평적 권위는 상대적으로 줄었다. 관객은 전문평론가의 말을 믿지 않고 자기 나름의 취향으로 영화를 선택하려 한다. 평론가들이 신통치 않아서인가, 관객이 영악해져서인가.

평론가들이 입을 모아 칭찬한 신인감독 정재은의 '작은'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는 이 영화를 살리자는 일부 열렬한 관객을 제외하고는 애석하게도 크게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란 괴이한 명칭의 대작 영화만이 서로 죽기살기 경쟁을 벌이는 판에 '작은' 영화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대안적 배급망의 구축, 실험적이고 독립적인 영화제작의 활성화, 다원주의적 관점에서 새로운 비평적 권위의 확립,문화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새로운 관객의 형성 등 한국 영화가 발전하기 위해 장기적으로 개척해나가야 할 일들은 많다. 물론 영화산업에 대한 공공적 차원의 지원을 확대하고 실질화하는 노력도 절실하게 요구된다. 시장의 논리에 모든 것을 맡겨놓을 수는 없다.

*** 혼란 거쳐야 발전도 가능

오랜 기간 우리는 불행한 정치사회적 환경, 경제적 토대의 열악함, 제작기술의 빈곤으로 한국 영화의 질적 낙후성을 설명해 왔다. 이제 이러한 악조건들이 점차 사라지고 바야흐로 한국 영화의 호황기를 맞으려고 하는 즈음에 우리는 양과 질의 균형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도록 요구받고 있는 셈이다.

이제 한국 영화는 도약하려는 단계다. 한국 영화 발전에 대한 낙관론이 다분히 우물안 개구리식의 지적 태만의 결과라고 하더라도 한 순간의 현상만 보고 거품이니 뭐니 하며 비관적 전망을 조급하게 피력하는 것도 습관적 경박성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내가 보기엔 한국 영화는 성장기의 동요와 불안을 겪고 있는 것 같다.

인생으로 따진다면 사춘기의 혼란 속에서 불균형한 성장곡선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영화의 주된 관객층을 이루고 있는 젊은이들처럼. 그런 점에서 나는 한국 영화의 발전을 낙관적으로 본다.

崔 旻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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