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金대통령의 배수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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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민주당 총재직 사퇴는 배수진(背水陣)을 친 단안이다. 金대통령이 구조적 정쟁의 늪에서 헤어나 국정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는 점에서 아주 다행스럽다.

여당마저 통제불능 상태에 이르는 등 최악의 상황에 떼밀려 이뤄진 만큼 한계가 있지만 金대통령이 고통스러운 결단을 내린 의지를 살린다면 임기 종반의 국정을 원만히 수행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 박지원(朴智元)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의 사표 수리 역시 국정쇄신의 시발이라 평가할 만하다.

사실 총체적 위기상황에서 金대통령이 여당 총재직을 겸하는 것은 여러 모로 걸맞지 않았다. 임기 1년 남짓한 시점에서 10.25 재.보선을 통해 확인된 민심은 현 체제를 더 이상 끌고 갈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金대통령으로서는 암울한 경제상황에다 편중인사로 인한 지역갈등 심화, 잇따른 권력형 비리의혹, 첨예화된 이념대립, 표류하는 외교 등 나라 안팎의 총체적 난맥에 대한 국민의 불만과 불안을 일과성 대증요법으로 호도하기에는 불가항력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압도적 다수의 야당이 장악한 국회는 무리수조차 통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다. "DJ당으로는 어렵다"는 비관론이 제기되는 등 여당 내부에서까지 대통령에게 화살을 겨누는 전례없는 내분상태는 레임덕이라는 표현조차 무색하게 했다.

이런 현실적인 요인이 아니더라도 당 총재직 사퇴는 金대통령의 당선 전 공약으로서 결국에는 지켜야 할 일이다.

전임 김영삼(金泳三).노태우(盧泰愚).전두환(全斗煥)대통령의 경우도 각기 다른 곡절 속에 여당 총재직을 내놓기는 했으나 여당 대통령 후보가 정해지기 전에 사퇴하지는 않았다. 그런 측면에서 상황의 불가피성을 감안하더라도 후일 평가받을 선례를 남겼다.

金대통령에게 남은 것은 총재 사퇴의 한 이유로 밝혔듯 경제살리기와 남북문제에 전념하는 일이다. 동시에 넓어진 운신의 폭을 십분 활용해 민심이반의 본질로 지적됐던 총체적 위기사항에 대한 철저한 점검 및 혁파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청와대와 검찰 등 권력기관을 우선한 공직사회 전반의 인사쇄신은 무엇보다 서둘러야 할 부분이다.

불신을 받는 이한동(李漢東)내각을 전면 개편해 신망있는, 전문성을 인정받는 인사들로 국정 중심 전문가 내각을 구성해야 한다. 그것이 뻔히 예견되는 공직자 줄대기 등 레임덕을 최소화하면서 초당적 협력을 일궈내는 첩경이다.

'주인' 잃은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 쟁탈전에 매달려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일 가능성이 크다. 민주당이 대통령을 돕기는 고사하고 10.25 재.보선 직후 내보인 집안싸움이나 거듭한다면 국민이 외면하는 여당 아닌 소수 정당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한나라당은 말 그대로의 초당적 협력을 통해 金대통령의 레임덕 가속화를 막아야 한다. 국정의 공백.혼란이 야기된다면 그 부담은 국정의 핵심축이 된 한나라당에 고스란히 전가될 것이다. 차기 대선구도를 비롯한 여러 정치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청와대와 여야 정치권 모두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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