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광장] 독 집권당의 참전 속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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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독일 정부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3천9백명의 군대를 파견키로 결정했다. 다음 주로 예정된 연방하원의 승인만 얻으면 독일 정부는 언제라도 군대를 아프간 지역에 파견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승인과정에서 적지않은 진통이 있을 수도 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부의 파병 결정은 외견상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했다. 그렇다고 미국의 압력에 밀려 '억지 춘향'으로 결정한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독일 정부가 내심 원해왔다고 볼 수 있다. 립서비스로 미국과의 '무한 연대'를 외쳐온 게 아니라 진실로 영국처럼 미국과 나란히 싸우고 싶어하는 것이다.

독일의 현 슈뢰더 정권은 사민당과 녹색당의 좌파연정이다. 사민당의 색깔이야 원래가 빨강이고, 정치스펙트럼으로 보면 녹색당은 사민당보다 더 왼쪽에 위치한 정당이다. 반전(反戰)은 좌파 정당의 트레이드 마크다. 무고한 민간인까지 다수 희생되고 있는 이번 전쟁에 반대는 못할 망정 최소한 '중간'은 가야 하는 데도 기꺼이 참전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집권 사민당과 녹색당 일부, 그리고 동독 공산당 후신인 민사당에서 반대 목소리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대세는 사실상 기울었다. 보수파 야당인 기민당과 자민당이 찬성하고 있기 때문에 의회의 승인은 기정사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소 반전의 목소리를 높이던 좌파 언론들도 파병에 따른 문제점을 제기할 뿐 드러내놓고 반대하는 곳은 없다.

독일 좌파연정의 참전 결의는 한마디로 국익을 위해서다. 아프가니스탄 참전을 계기로 독일은 20세기의 유산, 이른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원죄' 상태로부터 완전 해방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이제는 국제무대에서 경제력에 걸맞은 정치적 대우를 받겠다는 얘기다. 나아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계기로 재편되고 있는 새로운 국제질서 논의과정에서 소외되지 않고 당당히 제몫을 챙기겠다는 의도도 있다.

이탈리아 의회는 이미 파병안을 승인했고, 프랑스 정부도 파병을 결정할 예정이다. 모두 같은 이유에서다. 정치적 타결의 필요성을 외치면서도 국익을 위하는데 파병이 불가피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유럽 정치권의 냉정한 현실인식이다.

베를린=유재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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