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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와이드] 노량진 일대 '고시촌'에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최악의 취업난으로 취업 준비생들의 시름이 깊다. 그 중에서도 지방대생 등은 "기업들이 차별 대우를 한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그래서 이들은 공무원시험 등 '가장 공정한 취직시험'으로 불리는 국가고시에 매달린다. 혈기를 잠시 접고 미래를 준비하는 젊음이 있는 곳, 서울 노량진 학원가와 고시촌의 애환을 살짝 엿보았다.

#에피소드 1.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떨어졌다'는 말을 하지않는 게 불문율입니다. 그래서 지우개가 책상에서 떨어진 경우에도 "지우개가 떨어졌다"가 아니라 "지우개가 바닥에 찰싹 붙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에피소드 2.

길거리의 인형뽑기 기계에서 인형 7개를 뽑으면 합격한다는 규칙을 재미 삼아 정했습니다. 그런데 시험 이틀 전까지 4개밖에 뽑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시험 전날, 그 중요한 날에 밤 12시가 넘어 인형뽑기 기계 앞에서 1시간 동안 나머지 3마리를 뽑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지요.

지난해 말 5년간의 수험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한 고시생의 후일담이다. 노량진에서 만난 젊은이들은 이처럼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싸우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중압감에 비례해 생활은 단순하고 얼굴은 창백하다.

◇ 생존을 위한 전쟁터=서울의 대표적 고시촌은 관악구 신림동과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다. 신림동은 사법시험처럼 합격이 취직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고급 고시'를 준비하는 고시생들이 많다. 반면 노량진은 7.9급 공무원시험, 교사임용고시 등 보통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소박한 꿈을 간직한 수험생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4년간 노량진에서 공부하다 지금은 인터넷 사이트 '시험 아카데미'(exam.ac)를 운영하고 있는 이승영(李承泳.32)씨는 "사법고시 등은 졸업후 2~3년 공부하는 게 당연하다는 분위기지만 공무원시험은 졸업후 1년만 지나도 주위의 시선이 따갑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공무원시험 등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응시자의 90%가 대졸자이고, 준비기간이 평균 1년은 넘는 데다 90점 이상은 돼야 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쟁률도 수백대 1은 보통이다.

그래서인지 노량진에서 만난 수험생들은 이구동성으로 "부모님께 미안하다"고 말했다. 검찰직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朴모(29)씨는 "부모님 뵙기가 미안해 추석에 고향에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경남 진주 출신인 朴씨는 지난해 5월 시험에 떨어지고 11월부터 노량진에 둥지를 틀었다. 가족들에게 부담이 되기 싫어 그는 고시원에서 총무 일을 하고 있다. 총무는 고시원에서 청소 등 관리업무를 하는 대신 방값과 식대를 면제받는다.

서울 출신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대학 졸업반인 홍진철(洪鎭哲.28.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씨는 기업에 원서를 넣어보곤 있지만 마냥 기다릴 수 없어 최근 관세직 9급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오전 8시 집에서 나와 오전 9시~오후 1시 수업을 듣고 점심을 먹은 뒤 학원에 딸린 자습실에서 공부를 하다 오후 10시쯤 집으로 향하는, 쳇바퀴 도는 듯한 생활을 하고 있다.

洪씨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공부하기 때문에 집중할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혼자서 외롭게 이겨나가야 한다는 점이 가장 힘들다"고 토로했다.

◇ 수험 인프라=동작구 노량진 일대에는 대형 고시학원 및 입시학원 30개와 고시원 50여개가 몰려 있다. 입시학원인 중앙학원과 대성학원이 각각 1952년과 65년 개원하면서 학원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학원가'가 된 것은 공무원시험의 경쟁률이 높아진 80년대 중반부터. 서울고시학원의 공성호(孔成浩)주임은 "노량진 일대의 수험생은 1만5천~2만명이고 이 중 70%가 지방 학생들"이라고 귀띔했다.

학원이 늘어나면서 수험생을 위한 인프라도 점차 갖춰졌다. 수험생들이 잠깐 머리를 식힐 수 있는 만화방.PC방이 각각 30여곳 영업하고 있다. 정 만화방의 정건균(鄭建均.34)씨는 "점심, 저녁 식사 후에 손님이 많지만 1시간30분을 넘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식사는 수험생 대상 전문 음식점과 분식점에서 해결한다. 된장찌개가 2천5백원일 정도로 가격은 서울시내 다른 지역에 비해 싼 편이다. 식비는 한달에 13만원 안팎, 10장 쿠폰은 1만8천원 정도다. 수험생 전문 식당은 대부분 뷔페식이다.

서점은 정보 교환소 역할을 한다. 시험 서적만 취급하며 일반서점에선 보기 힘든 유명 강사의 강의 녹음 테이프를 판다. 헌책방 '청학동'의 이상규(李祥珪.33)씨는 "시험경향 등을 잘 아는 고시 경험자라야 책방을 꾸려갈 수 있다"고 말했다.

소음 방지용 귀마개(1천~2천원)나 책을 세워 놓고 볼 수 있는 독서대(1만~2만원)등 수험생용 상품도 눈길을 끈다. 두꺼운 책을 서너개 묶음으로 나눠서 휴대하기 편하게 하는 분철(分綴)도 학원가의 독특한 풍경이다.

고시원은 시설에 따라 월 10만원에서 30만원까지 다양하다. 방 크기는 1평~1.5평. 한 고시원 관계자는 "지방 학생의 경우 적어도 월 40만~50만원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영훈 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 고시원에도 새바람

사진=신인섭 기자

*** 고시원에도 새바람

*** 고시원에도 새바람

생활 수준의 향상과 자기 주장이 강한 신세대들의 등장으로 학원가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콘크리트벽 고시원'의 출현이다. 과거 고시원은 방과 방을 합판이나 스티로폼으로 만든 간이벽으로 구분했지만 최근 문을 여는 고시원들은 정식으로 벽을 만들어 소음을 줄이고 있다.

잠을 자려면 의자를 책상 위에 올려 놓아야 했던 방의 크기도 커져서 붙박이 침대와 책장이 갖춰진 곳이 많다. 에어컨이나 초고속 인터넷 통신망을 설치한 고시원들도 늘고 있는 추세다. 이런 곳은 한달에 방값이 30만원에 이른다.

수험생 최은수(여.26)씨는 "방값이 다소 부담스럽지만 더 깨끗한 환경에서 공부하고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 능률이 오른다"고 말했다.

여성전용 고시원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금남의 집'이지만 관리인 격인 총무는 남자 고시생들이 맡는다. 한 여성전용 고시원 관계자는 "방안에 사람이 있을 경우엔 어떤 경우라도 문을 열 수 없다는 것이 철칙"이라고 말했다.

변한 것은 잠자리뿐이 아니다. 과거 분식점과 쿠폰식 전용음식점만 있던 거리에는 최근 닭갈비집.패스트푸드점.테이크아웃 커피점 등이 다양하게 들어섰다. 7년째 이곳에서 식당을 하고 있는 홍기만(65)씨는 "음식이 입맛에 안맞으면 바로 식당을 옮기거나 항의할 정도로 수험생들의 자기 주장이 강해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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