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부산 역사학계 이끈 제1세대 '맏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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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87세를 일기로 지난 4일 별세한 우헌(又軒) 정중환(丁仲煥.전 동아대 대학원장)박사.

그는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가야사 연구서인 『가라사초(加羅史抄)』를 저술하는 등 고대사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또 지역문화재의 수집과 고분 발굴작업에 열정을 보인 현장 중시의 학자였다.

제자인 심봉근(沈奉謹.58)동아대 대학원장은 "제자들이 실수해도 꾸짖지 않고 항상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용기를 북돋워 준 분"이라고 애도했다.

丁박사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을 강조하곤 했다. 후학들이 더 나은 학문적 업적을 남겨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사학자이자 뛰어난 교육자였다.

'부산지역 역사학계 1세대의 맏형'으로 통한 그는 부산에서 태어났다. 1941년 일본 다이쇼(大正)대에서 한국사로 석사 과정까지 마쳤다. 48년 동아대 부교수로 취임해 부산지역 고대사 연구의 씨앗을 뿌렸다. 선사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한국사와 고고학.미술사를 연구하고 강의했다. 박물관장과 대학원장도 역임했다.

8년간 뼈를 깎는 노력 끝에 펴낸 『역주고려사(譯註高麗史)』는 고려사 연구의 초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경남의 왜성지(倭城址)』 등 저서는 지방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최근엔 노환으로 몸이 불편한데도 중국과 관련있는 한국의 자료를 집대성해 『지나사료초(支那史料抄)』1권을 낸 뒤 2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 유학 당시 한국의 주요 문화유산이 일본에 마구 반입되는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하곤 했다. 제자들에겐 "연구는 후배들에게 맡기더라도 문화재는 한 점이라도 더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아대 박물관의 유물은 매우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丁박사의 열정 덕분이라고 사학자들은 입을 모았다.

고인은 부산시 문화재위원과 경상남도 문화재위원을 지내며 '부산시사' 등을 편찬했다. 서울의 유수 대학에서 초빙을 받았으나 "지방의 발전을 위해 누군가 꼭 남아있어야 한다"며 고사했다.

69년엔 동아대의 복천동 고분군 발굴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이를 바탕으로 변한 12국 중 하나인 독로국(瀆盧國)이 동래지방에 있었다는 이론을 폈다.

丁박사는 연구의 바통을 많은 제자들에게 넘기고 떠났다.김석희.민성기.권달천.박용숙(이상 전 부산대)교수와 김동호(전 동아대).정징원(부산대).임효택(동의대).안춘배(신라대)교수 등 제자들은 추모논총의 간행을 준비 중이다.

부산=김관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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