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예산 달라고 떼쓸 때는 언제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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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기획예산처가 국가 예산을 쓰는 정부 각 부처와 기금.공기업 등에 "예산을 제발 좀 빨리 써달라"고 통사정을 하는 진풍경이 4개월째 계속되고 있다.

정부가 예산의 '조기 집행'을 강조해 온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올해 경기 둔화를 예상한 정부는 지난해 말 2001년 경제운용 계획을 수립하면서 경기 진작을 위해 예산의 60% 이상을 상반기 중에 조기 집행할 계획을 밝혔지만 기획예산처의 점검 결과에 따르면 상반기 중에 40% 정도가 집행되는 데 그쳤다.

하반기 들어 경기 침체 속도가 훨씬 빨라지자 정부는 지난 7월 '재정 집행 특별 점검단'까지 만들어 부처별로 예산 집행을 독려하고 나섰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에 못미치고 있다. 10월 말 현재 재정 집행 실적은 96조2천억원으로 정부의 연간 계획(1백25조1천억원) 대비 76.9%에 그치고 있다. 남은 두달간 써야 할 돈이 연간 계획의 4분의1에 해당하는 29조원이다. 정상적인 진도에 비해 한달 정도가 밀린 셈이다.

추경(追更) 지원분까지 합치면 22조원이 넘는 지방자치단체들의 사업비는 그나마 점검 대상에서 빠져 있어 중앙과 지방정부를 합친 재정 집행 실적은 이보다 더욱 떨어질 것이다.

이유는 부처마다 제각각이다. 예산을 쓰지 못할 이유가 있는데 무조건 쓰라고 다그치는 방식에도 문제는 있다. 그러나 예산을 달라고 매달릴 때와 집행에 나설 때의 자세가 너무 다르다는 기획예산처 관계자의 지적은 공감할 만하다.

해마다 연말에 예산을 허겁지겁 쓰느라 멀쩡한 도로나 상.하수도를 파헤치는 일이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예산 당국이나 국회도 예산 배정에만 매달리지 말고 집행의 효율성을 따져 공과(功過)를 가리는 작업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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