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문화적 히스테리 '책 장례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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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민주시민은 누구나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자유를 갖는다. 그러나 그 '표현의 자유'가 다른 이의 인격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지난 3일 이문열돕기 운동본부 소속 회원 50여명이 펼친 이문열씨 책 돌려주기 행사는 과연 정당한 '표현의 자유'에 속한 적절한 행위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게 한다.

이문열씨 소설을 읽어봤을까 싶을 정도로 나이 어린 어린이가 책의 겉표지로 만든 영정을 들고 있고, 길바닥에는 상여줄에 묶여 있는 책들이 널려 있는 한장의 사진은 마치 한 문학가의 장례를 치르는 듯하여 섬뜩하기조차 하다.

이씨가 쓴 책을 반환하겠다는 일부 독자들의 집단행동은 '홍위병' 운운한 이씨의 기고문에 반발한 일부 네티즌과 이씨가 격론을 벌이던 과정에서 빚어진 하나의 해프닝이었다. 그러나 이씨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책 반환 소동이 가라앉지 않고 급기야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책의 장례식'으로 번지고 말았다.

지성인, 더구나 문인이라면 누구보다도 적절한 단어를 선택해야 한다는 사회적 책무가 있다. 그러나 한 작가가 부적절한 단어를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책들을 '집단사망'시켜 장례를 치르는 행위는 도를 넘는 '집단 괴롭히기'와 다를 바 없다.

양식있는 독자라면 공개된 논의의 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떳떳이 토론하는 게 옳다. 또 한 작가의 가치관이 책의 작품성을 저해할 정도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그 작가의 책을 사지 않는 것이 독자로서 바른 권리를 행사하는 방법일 것이다.

작금의 우리 사회는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하는 데 몹시 인색하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지역이 다르다고, 편가르고 집단 괴롭히기를 일삼고 있다.

활발한 비판과 토론의 장을 통해 나와 남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어떻게 좁히고 융합해 나가느냐가 민주사회의 바른 언로(言路)일 것이다. '내편 아니면 적'이라는 식으로 패거리를 지어서는 사회발전은커녕 균열과 갈등만을 증폭시킬 뿐이다. '책의 장례식' 같은 문화적 히스테리는 다시 반복돼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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