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빵집이 다섯 개 있는 동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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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최정례(1955~ ), 「빵집이 다섯 개 있는 동네」 전문

우리 동네엔 빵집이 다섯 개 있다
빠리바게뜨, 엠마
김창근 베이커리, 신라당, 뚜레주르

빠리바게뜨에서는 쿠폰을 주고
엠마는 간판이 크고
김창근 베이커리는 유통기한
다 된 빵을 덤으로 준다
신라당은 오래 돼서
뚜레주르는 친절이 지나쳐서

그래서
나는 빠리바게뜨에 가고
나도 모르게 엠마에도 간다
미장원 냄새가 싫어서 빠르게 지나치면
김창근 베이커리가 나온다
내가 어렸을 땐
학교에서 급식으로 옥수수빵을 주었는데
하면서 신라당을 가고
무심코 뚜레주르도 가게 된다

밥 먹기 싫어서 빵을 사고
애들한테도
간단하게 빵 먹어라 한다

우리 동네엔 교회가 여섯이다
형님은 고3 딸 때문에 새벽교회를 다니고
윤희 엄마는 병들어 복음교회를 가고
은영이는 성가대 지휘자라서 주말엔 없다
넌 뭘 믿고 교회에 안나가냐고
겸손하라고
목사님 말씀을 들어보라며
내 귀에 테이프를 꽂아놓는다

우리 동네엔 빵집이 다섯
교회가 여섯 미장원이 일곱이다
사람들은 뛰듯이 걷고
누구나 다 파마를 염색을 하고
상가 입구에선 영생의 전도지를 돌린다
줄줄이 고깃집이 있고
김밥집이 있고
두 집 걸러 빵냄새가 나서
안 살 수가 없다
그렇다
살 수밖에 없다

소비가 미덕인 시대를 지나가고 있다. 돈이 없어도, 사고 싶은 마음이 없어도, 저절로 사게 되는 놀라운 경험은 이제 일상이 되어 있다. 과속이 아무리 위험하다고 홍보하고 속도위반에 아무리 많은 벌금을 물려도, 속도가 미덕인 자동차에서 속도에 길들여진 발은 액셀러레이터에서 잘 떼어지지 않는다. 중요하지만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가치들은 차창 밖에서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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