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레임덕을 키울 것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민주당이 내분의 늪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최고위원 전원이 사표를 냈지만 얼마만큼 당정 쇄신을 할지, 정치 일정을 어떻게 짤지를 놓고 혼선을 거듭하고 있다. 브루나이 정상회의에 참석 중인 김대중 대통령이 6일 귀국할 때까지 민주당은 지도부 공백이라는 일그러진 몰골로 굴러갈 수밖에 없는 처지다.

무엇보다 지난 3일 청와대 최고위원 회의가 무산된 것이 金대통령의 체통을 구겨 놓았다. 당 총재인 대통령이 소집한 회의가 최고위원간 집단 갈등 탓에 취소된 것은 과거 정권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막힌 사태다.

'과도 비상 체제론'도 나오고, 7일로 미룬 최고위원 회의 개최도 불투명하다고 하니 도대체 영(令)이 서지 않는 형국이다. 집권 후반기의 권력 누수(漏水)현상, 레임덕이 두드러진다는 게 이런 장면을 두고 하는 얘기다.

게다가 국민에게 더욱 꼴사납게 비춰지는 것은 이런 저런 '음모론'이다. '동교동계 구파에 책임 씌우기' '이인제 고사(枯死)음모론' '역(逆)음모론' 등 권력 갈등의 어둡고 치사하기조차 한 상호 비방이 이어지고 있다. 국정 쇄신은 어디 가고 대선 경쟁에 매달리고 있느냐는 국민의 개탄이 나오게 돼 있다.

이 지경에 이른 것은 金대통령에게도 책임이 있다. 당정의 인적 쇄신 문제가 절박한 과제라고 민심과 당내에서 오래 전부터 지적해 왔지만 대통령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수 국민은 대통령 주변의 소수 인사들이 통치 정보를 독점하고, 동교동계 구파의 비선 라인이 힘을 쓰고 있다는 논란을 국정 침체의 핵심 요인으로 꼽고 있다.

측근 인물들의 '사법적 잘못' 유무의 차원을 넘어 통치 보좌의 실책을 단호히 물어야 하고, 믿는 사람만 쓰는 金대통령의 용인술도 바꿔야 한다는 게 여론의 주문이다.

따라서 여권이 혼란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여론의 요구를 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회(迂廻)하면 할수록 레임덕을 스스로 키울 뿐이다. 귀국 후 金대통령의 결단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에 따라 국정 표류를 마감할 수 있을지가 판가름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