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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먼저 살겠다는 2010 그리스 vs 나라 먼저 살리자던 1998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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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그는 “수백만 명의 한국인이 장롱 속의 금붙이를 내놓았다”며 “나라의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민초들(grassroots)이 그렇게 노력한 것은 현대사에서 전례를 찾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물론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 “그리스에서 한국과 같은 금 모으기 운동이 일어나길 바라긴 어렵겠지만, 허리띠를 졸라매는 캠페인이 그리스뿐만 아니라 유로존의 다른 나라에서도 필수적”이란 것이다. 우리나라 외환위기와 그리스 재정위기는 국가 위기라는 점에선 닮았다. 그러나 원인과 전개 과정, 해법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페섹이 지적한 ‘국민의 태도 차이’도 그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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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재정은 튼튼=외환위기는 말 그대로 외환, 즉 달러가 부족해 발생했다. 민간 부문이 달러를 지나치게 많이 빌린 게 화근이었다. 태국 등지의 아시아 위기가 북상하면서 달러 빚이 많은 한국은 환투기꾼의 먹잇감으로 떠올랐다. 외환보유액은 이들의 공격을 막느라 허비했다. 그렇지만 국가재정의 건강상태는 어느 나라 부럽지 않은 수준이었다.

반면 그리스는 국가 재정에 문제가 있다. 거둬들이는 세금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았다. 이게 쌓이고 쌓여 재정파탄에 이른 것이다. 그리스에 돈을 빌려준 금융사는 빚을 못 받을 수도 있다며 2008년의 악몽을 떠올렸다. 금융사의 부실화는 금융시스템의 안정을 흔드는 지뢰이기 때문이다.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벌린 것은 한국이나 그리스나 마찬가지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시점에 신용등급을 떨어뜨리는 ‘미운 짓’만 하는 신용평가사에 속절없이 당한 사정도 엇비슷하다. 하지만 그리스엔 유럽연합(EU)이란 울타리가 있다. 물론 독일·프랑스 등은 그리스 지원을 놓고 티격태격했다. 그래도 외환위기 때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일본·중국과 비교하면 그리스는 동정심 많은 이웃을 두었다. 독일·프랑스라고 썩 내켰을 리 없다. 그렇지만 유로존이란 운명공동체를 인정하는 한 그리스 구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그리스와 남유럽 문제는 이미 주요 20개국(G20) 공조의 대상이다.

◆유로 볼모 삼은 그리스=그런 점에서 고립무원 상태에서 IMF란 구원의 손길만 갈구하던 우리와는 딴판이다. 그리스는 결국 유럽이다. 그리스 신화는 유럽인에게 마음의 고향이자 동질감의 뿌리다. 그리스가 부적격자 시비를 딛고 유로존에 들어간 것도 그 덕이요, 구제금융을 받는 처지에 배짱을 부리는 것도 그 덕이다.

허경욱 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사는 “우리의 외환위기는 아시아 외환위기 전염의 끝부분에 해당하고, 그리스는 유럽 재정위기의 진원지가 될지 모른다는 점에서 세계의 경각심에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IMF는 한국에 가혹한 조치를 요구했다. 점령군이었다. 금 모으기로 20억 달러를 모았으나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들의 처방은 외자 유인책인 고금리 정책, 부실 금융사와 기업을 솎아내는 구조조정이었다. 노사정 합의 아래 고통 분담으로 이걸 이겨냈다.

마침 세계경제가 그럭저럭 돌아간 덕에 물건을 싸게 팔면 팔 수 있었다. 수입은 줄었다. 고환율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엄청난 무역흑자 덕에 빚을 갚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달러가 없으면 못 살지만 그리스엔 달러와 얼마든지 교환되는 유로가 있다. 지불능력만 떨어질 뿐 유동성엔 문제가 없는 셈이다. 그래서 그리스인에겐 절박감이 덜하다. 최범수 신한금융지주 부사장은 “그리스의 구조조정은 아이슬란드 화산처럼 언제 끝날지 모를 일”이라고 말했다.

페섹은 그렇지만 그리스에 신속한 구조조정에 나서라고 촉구한다. “어차피 할 거라면 빨리 하라”는 것이다. 그는 “기사회생을 위해 어느 정도의 희생은 피할 수 없다”며 “구조조정 등의 조치가 경제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허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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