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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를 현자로 바꿀 수 있는 게 心志의 힘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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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호 08면

이 ‘학문’의 첫걸음은 무엇일까. 바로 ‘뜻’이다. 공자가 일찍이 말한다. “나는 도(道)를 삶의 목표로 설정했다(志於道).” 일상을 의미로 승화하는 것은 쉬워 보이지만 아주 먼 길이다.

한형조 교수의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율곡의 성학집요 <8> 입지(立志), 도에 뜻을 세우다

1. 입지
율곡은 19세, 금강산을 내려오면서 『자경문(自警文)』을 썼다. 첫머리에서 삶의 물길을 돌리겠다는 각오가 선연하다. “우선 뜻을 크게 가지자. 성인(聖人)을 목표로 삼고, 거기 한 치라도 빠진다면 내 일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아동용 입문서인 『격몽요결』의 첫 장도 ‘입지(立志)’로 시작하고, 제왕을 위한 학문 『성학집요』를 열어도 곧바로 이 권고와 만난다. 견고한 의지 없이 무슨 성취를 기대하는 것은 흡사 ‘기름 위에 그림을 그리고, 얼음 위에 조각을 새기는 것(畵脂鏤氷)’과 같을 것이다.

율곡은 그렇다고 너무 겁내지는 말라고 다독거린다. 1)성인은 까마득해 보이지만, 계시나 점지가 아니라 다만 이 학문의 길을 충실히 걸은 분일 뿐이다. 그러니 “너도 할 수 있다.” 2)그 가능성과 조건은 누구나 예외 없이 자신의 ‘본성’ 속에 갖추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라. “누구나 이 학문을 통해 성인을 성취할 수 있다(聖人可學而至).”

2. 목표
도(道)라는 이름으로 지향하는 곳은 어디까지인가. 율곡은 북송의 장재(張載·1020~77)의 유명한 캐치프레이즈를 문 앞에 내걸었다.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생민을 위하여 도를 세운다. 앞서 간 성현들을 위해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해 태평을 연다(爲天地立心, 爲生民立道, 爲去聖繼絶學, 爲萬世開大平).”

네 항목에 대해 몇 마디 노트해 본다.
1)천지: 자연의 창조력은 햇빛처럼 무한히 베풀고 어김없이 질서를 지키는 성실(誠) 위에 서 있다. 인간도 그 태극(太極)의 공능과 빛을 통해 여기 참여할 책무를 부여 받은 ‘작은 우주’다.

2)생민: 우주적 참여는 삶의 길을 밝히고(建明義理), 관계의 도리를 정착시키는(扶植綱常) 자리에서 피어난다. 군주의 책임은 더 무겁다. 백성들의 ‘교양(敎養)’, 즉 생활 안정과 인문 교육의 소명을 두 어깨에 걸고 있는 것이다.

3)학문: 유교는 이 학문의 등불이 맹자 때에 끊어졌다고 생각한다. 공리주의의 득세와 신비주의의 만연에 따라 유교의 목소리는 잦아들고, 그 지식마저 단순 교양이나 공무원 시험으로 소외되었다. 그렇게 어둠 속에 묻혀버린 유교를, 그 ‘끊어진 학문’을 다시금 이어야겠다는 각오다.

4)태평: 이는 특히 군주의 책무이다. 정자(程子)는 부언한다. “통치자의 도(道), 그 기초는 정학(正學)을 성찰하여, 결국 무엇이 최선인지를 확인하고, 진실과 거짓을 분명히 구분하는 데 있다. 그래야 어디를 향해 나아갈지를 결정할 수 있다.” 그는 덧붙인다. “갈 길이 뚜렷하지 않으면 딴소리에 그만 혹(惑)할 것이고, 의지가 확고하지 않으면 목표를 잃고 주저앉게 되고 만다.”

위의 가치를 실현하는 도정에 인(仁)이 있다. 높디 높은 이상이지만 그것을 성취하고 말고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 공자는 말한다. “인(仁)이 어디 멀리 있겠는가. 내가 원하면 그것은 여기 있다(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 “인을 향해 나아가는 삶은 실패하지 않는다(苟志於仁矣, 無惡也).”

주저하는 사람들을 향해 주자는 격려한다. “봄의 따뜻한 기운이 뻗치면 쇠와 돌도 뚫고 들어간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니, 정력을 집중하면 안 될 일이 없다.”(농담 한 자락. 70년대 어느 기업인은 자전적 회고에서 이 구절을,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도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로 읽으면 왜 안 되느냐고 우겨, 밥알을 튀긴 적이 있다)

3. 격려
그런데 왜 그토록 “뜻을 세우기가 어려운가”. 율곡은 ‘입지’ 장 마지막에 자신의 의견과 충고를 첨부했다. 이유는 세 가지다.

1)불신(不信). “믿지 않는 자(不信者)들은 성현의 가르침을 거짓 유인책으로 안다. 그들은 문장을 가지고 놀 뿐 몸으로 체화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읽기는 성현의 책이되, 답습하는 것은 여전히 ‘세속의 관행(世俗之行)’이다.”

2)회피(不智). “무덤 파고 장돌뱅이 흉내를 내던 맹자도 성자의 반열(亞聖)에 올랐고, 사냥에 날 새는 줄 모르던 정자(程子)도 큰 현자(大賢)가 되었다. 그런데 저 어리석은 자들(不智)은 못난 자질을 탓하며 스스로의 삶에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읽는 것은 성현의 책인데, 지키는 것은 ‘조야한 성품(氣質之拘)’ 그대로다.”

3)우유부단(不勇). “성현의 충고를 믿고, 성격의 변화에 기대를 걸기는 하나 실제 떨치고 일어나지는 않는다. ‘어제 한 일을 오늘 고치지 못하고, 오늘 좋아하는 일을 내일 바꾸기 꺼린다.’ 그래서 읽는 것은 성인의 책인데, 편안해하기는 ‘해 오던 대로의 습관(舊日之習)’이다.” 율곡은 그들을 힘껏 떼다 민다. “못생긴 얼굴을 예쁘게 고칠 수 없고, 약골을 건장하게 만들 수 없으며, 짧은 키를 억지로 늘릴 수는 없다. 그러나 심지(心志)는 다르다.

그것은 어리석음을 지혜롭게, 한심한 자를 현자로 변화시킬 수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마음의 허령(虛靈), 즉 비어 있으면서도 신비한 특성은 유전적 제약이나 개별적 ‘기질(氣質)’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 독립(不昧)의 가능성을 최고도로 발휘하라. 하려고 하는 의지만 분명하다면, 그리고 물러서지 않는다면 너는 마침내 길(道)을 성취할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전한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주희에서 정약용으로』『조선유학의 거장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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