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중앙일보 테스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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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뉴욕 타임스 테스트'란 말이 있다. 예컨대 뉴욕의 법률회사가 논란의 소지가 있는 문제를 놓고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치자. 이때 중요한 판단 기준 하나가 "언제고 뉴욕 타임스 1면에 이번 일이 기사로 실린다해도 떳떳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게 바로 '뉴욕 타임스 테스트'다.

*** 가판 폐지는 개혁의 출발

필자도 '뉴욕 타임스 테스트'란 말을 최근 국내의 한 법률전문가로부터 처음 들었다. 중앙일보가 지난 16일자부터 국내 신문 중 처음으로 이른바 '가판'을 없앤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자리에서다. 신문에 대해 잘 아는 그는 '뉴욕 타임스 테스트'를 이야기해주며 "결국 '중앙일보 테스트'란 말이 나올 수 있도록 중앙일보 가판 폐지가 성공하기 바란다"고 격려해주었다.

중앙일보 가판 폐지의 핵심을 이만큼 정확히 짚어낸 경우는 별로 없다. 가판을 없앤다는 간단한(!) 변화 하나가 언론과 우리 사회에 대단한(!) 변혁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조간신문 가판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실상 그리 많지 않다. 알 필요도 별로 없다. 그러나 '퇴근길에 사 볼 수 있는 내일 조간'이라면 대개 안다. 땅거미가 질 때쯤이면 서울시내 중심가 일부 가판대에서 가판을 팔기 시작한다.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며 가판을 펼쳐들고 읽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그런데 정작 가판을 가장 열심히 보는 사람들은 퇴근길 직장인들이 아니라 주요 기관.기업 등에서 신문을 '체크'하는 사람들, 그리고 신문기자 자신들이라는 것에 문제가 있다.

불리한 기사는 줄이거나 빼고 유리한 기사는 더 돋보이도록 어찌해보려는 것이 가판을 체크하는 사람들의 임무다. '남의 답안지'를 보고 빠진 기사는 베끼거나 확인해서 넣고 부족하다싶은 부분은 남과 비슷하게 고치거나 하는 것이 다른 신문을 참고하는 기자들의 일이다.

이 과정에서 기사의 틀린 부분을 발견하고 제대로 바로잡는 경우도 있지만, 외부로부터의 부적절한 '요청'에 시달리고 흔들리거나 결국 그 신문이 그 신문이 돼버리는 부작용이 훨씬 크다.

이런 가판을 없애면 어떻게 될까. 가판을 없애고 1주일, 중앙일보 편집국에서 그간 실제 일어난 변화들을 보면 가판 폐지가 왜 중요한 언론개혁의 하나인지를 알 수 있다.

우선 편집국 전체가 더욱 신중해졌다. 기자 대신(?) 가판을 이 잡듯이 읽고 체크해주는 사람들이 없는데 어찌 신중해지지 않을손가. 그러면서도 소모적인 일 부담은 줄고 기사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은 더 늘었다.

내 자신 퇴근 후 저녁자리부터가 편안해졌다. 고쳐달라, 빼달라 하는 전화가 뚝 끊겼기 때문이다. 내가 편안해진 만큼 신문을 체크하는 사람들도 편안한 저녁을 맞을 것이다.

기자들도 기사에 자신이 있으면 바로 퇴근하면 그만이다. 가판 놓고 회의하고, 다른 조간 보고 고치고, 외부 전화 받고 밀고 당기고, 저녁 먹다 일어나 다시 편집국에 들어가고, 파김치가 된 채 다시 출근하고 하던 일상들이 이제 다 '쓸데없는 일'이 돼가고 있다.

그 시간을 아껴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대신 야근 당번들의 책임은 더 무거워졌다. 조간 편집국 밤샘다운 밤샘을 해야 퇴근한 동료들이 발을 뻗고 쉬며 내일을 준비한다. 자기 일이 터지면 스스로 뛰어 들어올 동료들이 아닌가.

*** 선순환돼야 사회 투명해져

만일 다른 신문도 가판을 없앤다면 중앙일보만이 아니라 모든 신문의 기자들이 편해질 것이다.

가판 폐지 하나가 이끌어내고 있는 변화는 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문다. 신중한 보도, 기사.지면의 완성도 높이기, 기자들의 생산적 시간활용, 외부의 부적절한 영향력 배제, 사회의 투명성 확보 노력…. 이런 것이 바로 언론개혁의 선순환 아니겠는가.

가판을 없앤 중앙일보 편집국이 이같은 선순환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일들은 앞으로도 많다. 그 선순환의 끝에 예컨대 '중앙일보 테스트'와 같은 기준이 선다면 우리 사회는 한결 좋아져 있을 것이다.

김수길 경제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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