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 칼럼] 국운 암담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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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1세기 초 한국에 대운(大運)이 올 것이란 예언에 막연한 기대감을 가졌던 적도 있었지만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대운은커녕 절로 국운암담론에 빠져들게 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1년을 어찌 보낼까 하고 탄식하고 있다. 정말 지금의 이런 상태로 남은 1년을 보낼 일이 아득한데 생각해 보면 1년 이후 다음 정권에 가서도 구시대의 뒤치다꺼리 때문에 국운개척의 여력(餘力)이 있을지도 걱정이다.

이미 우리사회에는 원한과 증오가 너무 깊이 쌓여 있다. 여야간에는 물론 공공기관.직장.지역 할 것 없이 득세한 자와 실세(失勢)한 자, 해먹은 자와 밀려난 자, 재미본 자와 손해본 자… 등이 갈려 깊은 원한과 증오가 맺혀 있다. 납득못할 인사와 감원(減員)과 수주(受注)와 세무조사와 도청과 수사가 필연적으로 부른 결과다.

*** 너무 깊이 맺힌 원한 ·증오

야당은 입으로 정치보복 금지를 말하고 있지만 실제 집권하면 그런 자제력이 있을지 의문이다. 아마 그들 내부에서 또는 사회 각계각층에서 원상회복을 요구하는 소리와 억울함을 풀자는 움직임이 봇물처럼 터져 나올 가능성이 크다.

요즘같은 상황이라면 여당이 재집권하더라도 전(前)정권과의 승계보다는 단절쪽에 무게를 더 두거나 선별적.비판적 승계로 나가기 쉬울 것이다. 따라서 다음에 누가 집권하든 축적된 원한과 증오를 처리.관리하는 데 엄청난 정치력.사회력을 쏟아붓는 것이 불가피할 것이다.

이런 부담에 더해 계속 터져 나오는 각종 비리의혹이 미래의 우리 발목을 잡을 것도 확실해졌다. 지금 민심을 뒤흔들고 있는 '게이트'의 진상규명과 뒤처리 작업도 필경 다음 정권의 몫이 될 공산이 크다.

요즘 사람들은 말한다.… 해먹더라도 좀 들키지 않게, 세련되게 해먹어라. 이렇게 거칠게 마구잡이로 해먹다니, 그래서 세상을 이렇듯 시끄럽게 하고 사람 마음을 뒤집어 놓다니 ×××들….

이제 부패척결은 누구도 믿지 않게 돼버렸다. 숨어 있는 부패를 척결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들킨 부패만은 척결 시늉만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들킨 부패를 유야무야 쓱싹 하는 것은 더 악질이고 해악(害惡)이 크다.

이용호의 경우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누가 풀어주고 비호했는지 조사는 했고 검사 3명의 사표를 받아 문책형식이라도 갖췄다. 그러나 국정원 경제단장의 경우 10개월동안 수사 않은 경위와 책임문제는 지금 누가 조사라도 하고 있는가. 4.19정신과 조세정의로 유명한 안정남씨의 대치동 부동산도 문제로 부각된 이상 조사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나.

특정인이 우체국 돈을 무려 16조원이나 예금유치했다는 일의 내막을 국민도 좀 알면 안될까. 분당 토지의 배후나 동부지청 부장검사의 말씀이 담긴 녹취록의 수수께끼도 그냥 넘겨버릴 수는 없다.

그렇지만 돌아가는 꼴을 보면 이런 의혹, 이런 궁금증이 1년 안에 개운하게 풀릴 것이라곤 기대하기 어렵다. 집권측은 의혹에 대해 야당의 근거 없는 정치공세니 부풀리기니 하며 해명과 고소로 대응하고 있지만 국민의 마음 속에서 의혹의 그림자를 지우진 못하고 있다.

더구나 김홍일 의원 이름이 나오자 돌연 의원면책특권 제한론을 제기하고 야당 사무실을 기습 수색하는 것을 보면 국민 의혹 해소는 더욱 멀어지는 감이 있다. 아마 비리의혹 역시 재수사가 되든 청문회가 되든 다음 정권의 부담으로 넘어가 다시 정치력.사회력을 소모하게 될 게 틀림 없을 것이다. 또 한번 국운암담을 느끼게 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다음정권에 부담 덜 줘야

이런 재앙을 피하자면 지금 우리사회에 만연한 끼리끼리의 흐름, 부패의 흐름, 안면몰수의 흐름을 끊어야 하는데 이 역시 가능할 것 같지 않다. '국정대청소 강조주간'이라도 설정해 대청소.대숙정을 단행하고, '새 판'을 짜라고 촉구하고 싶지만 정권쪽에 이미 그럴 의지나 능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다만 말하고 싶은 것은 각종 비리의혹은 다음 정권에서 규명.문책받기보다는 그래도 현정부 임기 내에 털고 청산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너무 허무하고 흉한 유산을 물려주면 다음 정권 5년까지도 멍들고 피곤하게 된다는 점을 유념해 지금부터라도 다음 정권에 부담을 덜 주는 국정처리를 하도록 권하고 싶다. 혹시라도 민간분야의 용솟음치는 에너지의 분출이나 상상밖의 국제환경 변화로 국운암담론이 빗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송진혁 <논설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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