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5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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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백거이의 시 중에서 백미인 '초당중제(草堂重題)'의 시문은 다음과 같다.

"해가 높고 잠 만족하나 아직 일어나기 싫어 게으름은 작은 집에 겹이불로도 추위가 무섭지 않기 때문 유애사의 종소리는 베개를 세워 듣고 있고 향로봉의 눈경치는 발을 걷어 올리고 본다네 광려산은 이름 피할 곳으로서 괜찮으며 사마는 늙음 보낼 벼슬로서 역시 맞아 마음 편하고 몸 편한 이곳이 곧 갈 곳이지 고향이 유독 장안에만 있을 수 있겠는가."

이 중에서도 특히 '향로봉의 눈경치는 발을 걷어 올리고 본다네(香爐峰雪撥簾看)'란 문구는 절창으로 신라의 귀족들은 이 문구를 모두 암송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백거이의 시문을 장보고가 진상하여 올린 것이었다. 그것도 백거이의 '좌우명(座右銘)'을 담은 시문을. 이것은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엄청난 사건이었던 것이었다.

당시 신라와 당나라는 공무역(公貿易)으로 교역품(交易品)역시 빈약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기록에 의하면 신라에서 당으로 수출된 교역품으로는 금속공예품, 금과 은.동, 동제품, 직물공예품,직물, 각종 약재, 향유, 말, 매, 해수피(海獸皮), 노비. 당에서 신라로 수입된 것으로는 각종 공예품, 비단을 비롯한 견직물, 차, 서적 등의 물건이 고작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니 장보고가 가져온 진품들은 지금까지는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진귀한 물건들이었으며 그 보다 더 흥덕대왕을 비롯하여 신라의 귀족들을 흥분시킨 것은 바로 백거이의 시문이었던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문화(文化)의 교류였던 것이었다. 이를테면 바다 건너 또 그 바다 건너의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계와의 문명교류였을 뿐 아니라 새로운 정신, 새로운 사상에 대한 문화교류였던 것이다.

이처럼 장보고가 펼쳐 보인 마법의 신세계가 흥덕대왕을 비롯하여 중앙권력들에게 준 충격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장보고는 흥덕대왕을 사로잡을 마지막 선물을 꺼내보였던 것이었다. 그것은 주방(周昉)의 그림이었다.

백거이가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다면 주방 역시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것이었다.

주방은 수도인 장안 출신으로 문예.서화 일반에 모두 뛰어났으나 특히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에 능하여 채색유려(彩色柔麗), 의장경단(衣裝勁簞), 보살단엄(菩薩端嚴)이라는 특별한 평가를 받았던 화가였던 것이다.

특히 그가 유명해진 것은 당나라의 제9대 황제였던 덕종(德宗 742~805)의 명에 의해서 장경사(章敬寺)에 벽화를 그려서 절찬을 받았고, 직접 황제로부터 '신기의 예술이다'라는 극찬을 받은 이후부터였던 것이었다.

장보고가 흥덕대왕에게 바친 마지막 선물은 바로 주방이 그린 '수월관음상(水月觀音像)'이었던 것이었다.

주방은 특히 '수월관음상'을 그리는데 있어 새로운 화풍을 창조해낸 것으로 유명했는데 바로 그 수월관음상을 흥덕대왕 앞에서 펼쳐보였던 것이었다.

"아니."

수월관음상을 본 흥덕대왕은 경탄하여 말하였다. 뛰어난 예술적 심미안을 지녔던 흥덕대왕은 한눈에 이미 그 그림이 주방의 솜씨임을 알아보았던 것이었다.

"이 그림은 주방의 그림이 아닐 것이냐."

"그렇사옵나이다, 대왕마마."

장보고는 큰소리로 대답하여 말하였다.

"이 그림은 경원(景元)의 그림이나이다."

경원은 주방의 호로 수월관음상 밑에는 주방의 그림을 나타내는 '경원'이라는 낙관까지 선명하게 찍혀있지 아니한가.

이에 관한 기록이 또한 오늘날까지 남아 전한다.

북송의 곽약허(郭若虛)가 1076년에 완성한 '도화견문지(圖畵見文誌)'에 의하면 신라상인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당의 정원(貞元 785~804) 연간에는 저명한 인물화가 주방의 작품 수십점을 초주(楚州)와 양주지방에서 고가로 사가지고 귀국하는 신라상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저명한 인물화가 주방의 작품들을 고가로 구입했던 신라상인들 역시 장보고가 이끄는 신라선단임이 분명할 것이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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