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홍의 정치보기] 이인제식 계산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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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름을 대봐요." 이인제 민주당 최고위원은 다그치듯 물었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 대적할 만한 여권의 후보감을 대보라는 것이었다. 그래놓고 대답은 자기가 했다.

"결국 나요. 여론조사 결과가 그래요." 그러곤 다시 물었다.

"정계개편이 왜 필요하죠?" 역시 자문자답이었다.

"지각이 변동하자면 땅속에 이글거리는 에너지가 있어야 해요. 지금 그런 에너지가 있어요? 없어요. 그런데도 왜 하자는거예요?"

이번엔 질문만 던져놓고 다른 얘기를 했다.

"누구를 배제하기 위한 정계개편은 지지를 받을 수 없어요." 정계개편의 의도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 반(反)이회창이란 포장 속에 비(非)이인제가 숨어있지 않나 하는 의심. 석달 전에 만났을 때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여당이 이회창 총재라는 상대후보를 무력화함으로써 여권 내 차기후보에 대한 선택의 폭을 넓히려 해요."

쉽게 말해 이길 후보보다는 마음에 드는 후보를 고르려 한다는 얘기였다. 득표력보다는 충성 우선. 그 해결책은 이회창 무력화. 영남후보 얘기가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봤다. 이번에도 같은 이유로 이회창 무력화 대신 정계개편론이 나왔다고 보는 것 같다.

"3자구도니 4자필승이니 3金연합이니 하는 게 가능한 얘깁니까." 현실성도 명분도 없다고 했다.

"결국은 돌고돌아 제자리로 올거요."

그가 내린 결론은 명료했다. 그 이유도 간단했다. 해석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YS(김영삼)와 JP(김종필)의 연합을 아주 색다르게 봤다. "YS는 JP가 이회창씨와 붙지 못하게 하려고 JP를 잡은 겁니다. YS가 곁에 있는 한 JP는 李총재와 연합할 수 없어요. DJ(김대중)한테 돌아갈 수도 없고요."

YS가 정계개편을 저지하기 위해 그 한복판에 섰다는 얘기였다. 항간의 분석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李위원은 단지 자신의 생각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누구를 위해 YS가 그런다고 봅니까."

"이회창씨가 싫은 거지요."

"그럼 YS는 마음속으로 누구를 지지한다고 봅니까."

"최소한 이회창씨보단 나를 덜 싫어하겠죠."

"DJ 밑에 있는 李위원을 YS가 지지할까요."

짧기만 했던 그의 대답은 여기서 길어졌다.

"일단 내가 후보가 된다면 지지하지 못할 이유는 없죠. 다음 선거에 DJ는 없어요. 오직 후보만이 존재합니다. 증오의 대상이 없어요."

충청도 선배인 JP를 잡아볼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

"3년 동안 내가 만나자고 했어도 안 만나줬소. 거지가 그랬어도 만나주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내가 그 집 앞에서 거지노릇할 순 없잖소." 더 이상 손을 내밀 의사가 없었다. JP변수를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

"DJ와는 언제 독대하셨나요."

"지난해 총선 때 이후론 못 했습니다." 측근에 따르면 지난해 1월 9일이 마지막이란다. 통틀어 두번이 전부라고 했다. 후견인격인 권노갑 고문도 석달 전부턴 따로 만나지 못했다 한다. 물론 "그것이 李위원을 위해서"란 설명은 있었다지만. 공교롭게도 그 때가 정계개편 얘기가 나오기 시작할 때였다.

"앞으로 어떻게 임할 건가요."

"내 갈 길 가는거지. 뭐." 그 말이 오해를 살까 싶었던지 서둘러 한마디를 보탰다. "이러나저러나 잘 될거요. 제자리로 온다니까. " 예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이연홍 편집위원(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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