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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평] 영어교육 현실화 하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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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국에는 한글이라는 고유의 언어가 있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한글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한국에 살면서 제일 자주 받는 질문 중의 하나가 "한국어를 할 줄 압니까?"라는 질문이다. "아니오, 인사말이나 기본적인 것 외에는 못합니다"라고 대답하면 한국인들은 꽤 실망하는 것 같다.

***만만찮은 한국어 배우기

한국에 살려면 외국인이라도 당연히 한국말을 배워야 하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비즈니스하는 외국인 치고 한국어를 배우려고 시도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내가 아는 주변의 외국인 대부분은 어떤 형태로든 한국어 교습을 받고 있거나 받은 경험이 있다. 한국으로 발령이 나 근무를 시작하면 처음 몇개월은 모두 의욕을 갖고 열심히 개인강습을 받지만 점점 시들해져서 대부분 중간에 포기하고 만다.

영어권 국가의 사람이 한국어를 배워 유창하게 읽고 쓰고 말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어 배우기를 시도했던 대부분의 외국인은 간단한 인사말이나 음식 주문, 택시를 탔을 때 방향을 말할 정도의 한국어 수준에서 그냥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 그런 외국인들의 내면에는 몇년 한국에서 살다가 다른 나라로 발령이 나서 근무를 하게 되면 한국어를 더 이상 활용할 수 없다는 의식이 조금은 자리잡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상황들이 어우러져서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한글 배우기를 포기한 외국인들이 한국인들에게 영어를 좀 더 잘할 수 있도록 영어 교육을 현실화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한다면, 무척이나 주제 넘는다고 생각할 한국인들도 꽤 있을 것 같다.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 외국인들에게 무척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인들이 영어를 배우는 것 또한 상당히 고생스러운 일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 언어를 배운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도전적인 일이다. 더구나 한국어와 영어는 언어학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문법.발음.철자법 등 모든 구조가 전혀 달라 말을 처음 배우는 아기의 심정으로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영어를 배우기 위해 투자하는 노력.시간.비용은 엄청난 것 같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영어 독해 및 작문능력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실제 비즈니스 세계에서 영어를 잘 구사하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은 것 같다.

분명 몇년 전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홍콩.싱가포르 등 경쟁국가들에 비하면 아직도 많이 처진 것이 사실이다. 내 경험으로도 길이나 지하철 혹은 공공기관에서 만나는 한국인들에게 영어로 질문했을 때 자연스럽게 영어로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을 그리 많이 만나지 못했다.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투자한 결과치고는 그렇게 만족할 만한 영어 수준은 아닌 것이다.

한국은 경제분야에 있어 무역의 비중이 상당히 큰 나라다. 그리고 영어는 세계무대에서 비즈니스의 표준어다.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국제적인 비즈니스에서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국 언어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가진 프랑스조차 예외는 아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루이비통이나 카르티에 같은 세계적인 프랑스 회사들도 영어를 쓴다. 독일에 본사가 있는 다임러 크라이슬러.알리안츠 등도 마찬가지다.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아시아 지역 본부를 결정할 때 홍콩이나 싱가포르가 우선 대상이 되는 주요 이유 중의 하나도 국민들의 평균적인 영어실력일 것이다.

***독해보다 말하기 실력을

인터넷의 발전에 따라 앞으로 영어는 점점 더 우리 생활에 밀접한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자리잡을 것이다. 따라서 영어를 잘 하는 것은 한국인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된다.

그리고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려면 언어 형성기에 말하기와 듣기에 대한 학습을 꾸준히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많은 한국의 엄마들이 아주 어린 아이들을 영어학원에 비싼 비용을 지불하면서 보내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너무 이른 조기 교육으로는 교육의 효과를 충분하게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21세기에 세계 경제무대에서 주역이 되려면 문법과 쓰기.독해위주의 영어교육 보다는 영어를 제대로 알아듣고 말하는 방식으로 개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면 영어 때문에 굳이 아내와 자녀를 외국으로 보내 놓고 여기서 홀로 돈 벌어야 되는 기러기 아빠들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웨인첨리(다임러크라이슬러 코리아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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