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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테러 종식 보복만이 능사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미국의 동시다발 테러사건 이후 유명해진 사람이 있다면 파키스탄 주재 탈레반 대사인 살람 자이프일 것이다.

유일하게 국제사회를 향한 창구 역할을 하는 그의 어눌한 영어를 외신기자들은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받아적기에 바쁘다. 그는 늘 기자회견을 "신의 가호가 있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이슬람식 인사로 시작하고 기자들의 질문에도 곧장 이슬람법을 인용해 답변하는 바람에 비이슬람권에서 온 외신기자들을 어리둥절케 하기도 한다.

비단 자이프 대사뿐 아니라 탈레반은 모든 것이 그런 식이다.모든 가치보다 종교적 가치를 앞세우고 절대시하는 정교일치(政敎一致)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서구적 사고방식과 극단적 이슬람 원리주의에 바탕을 둔 탈레반의 사고방식은 애초부터 대화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냐는 회의감마저 들게 한다.

그런 탈레반이 14일엔 교묘한 '언론 플레이'를 연출해 보였다.CNN.BBC방송과 AP.AFP통신 등 세계의 유력 언론사 기자들만 골라 아프가니스탄 영토 내 잘랄라바드로 초청,폭격당한 민간인 거주지역을 취재하도록 허용한 것이다.

탈레반은 미국의 공격으로 무고한 시민이 희생되고 있다는 사실을,그것도 서방언론을 통해 내보냄으로써 반전여론에 호소하려는 '심리전 전술'을 사용한 것이다. 문제는 그런 심리전의 빌미를 미국이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민간인 거주지역에 대한 오폭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다는 소식은 전세계 이슬람 교도들의 반미감정을 들끓게 하고 있다.

미국은 압도적인 화력을 동원한 폭격을 개시하면서 이미 되돌릴 수 없는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했다.그 전쟁의 명분엔 국제사회도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이슬람권을 대상으로 한 적극적인 외교전과 설득작업 없이 군사작전만으로 해결될 것으로 기대한다면 큰 오산일 수 있다. 테러와 보복 공격의 악순환은 더 큰 비극을 낳게 마련이다.

그런 과정에서 온건한 이슬람 교도들마저 '무자헤딘(전사)'의 길로 내몰 수도 있는 것이다. 악화일로에 있는 파키스탄 등 이슬람권의 반미시위를 보면서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해진다.

예영준 기자 이슬라마바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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