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건 탈출… 길은 없고 브로커의 유혹에 빠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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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1=지난달 15일 오전 6시(현지시간) 중국 베이징(北京) 싼리툰(三里屯) 외교 단지. 탈북자 14명이 주중 한국대사관 영사부 담의 철조망을 끊고 넘어가고 있었다. 같은 시간 30여m 떨어진 골목에서는 또 다른 탈북자 10여명이 이들의 월담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탈북자 일행의 리더격인 40대 브로커는 "이거 한꺼번에 들어가면 안 되겠는걸"이라며 주변의 동태를 살핀 뒤 탈북자 일행을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먼저 온 탈북자들의 월담으로 대사관 측의 경비가 강화되자 대사관 진입을 일단 포기하고 돌아간 것이었다.

#장면 2=지난해 1월 전모(50.여)씨는 북한에서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갔다. 국경경비대에 건넨 '도강료'는 20여만원. 이 대가로 국경 순찰이 소홀한 장소와 시간대를 알아냈다.

"중국 공안의 단속을 피해 닭장에 숨어 지내기도 했다"는 그는 지난해 7월 입국 알선 브로커를 만났다. "한국에 데려다주면 250만원을 주겠다"는 각서를 쓰고 같은 해 9월 중국 난닝(南寧)에서 다른 탈북자 10여명과 함께 베트남 하노이로 가는 배에 올랐다.

이어 호치민과 캄보디아 프놈펜을 거쳐 지난 5월 서울에 도착했다.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에 따르면 중국을 떠도는 탈북자는 10만명. 이들을 상대로 국내 입국을 알선해주고 돈을 챙기는 브로커들이 활개치고 있다.

<관계기사 8면>

본사가 접촉한 국내와 중국 내 브로커들에 따르면 탈북 수수료는 200만~1200만원 선으로 루트와 브로커에 따라 다양하다. 보통 공관.학교 등 외국 시설물에 진입하는 방법에는 200만~500만원을 받는다. 동남아 등 제3국을 통해 입국하는 방법은 300만~600만원, 항공편으로 바로 입국할 수 있는 위조여권 수법은 1000만~1200만원대에 거래된다.

이들은 탈북자들이 이 같은 거액의 탈북 수수료가 없다는 점을 알고 국내에 도착하면 지원받는 정착지원금을 노려 다양한 형태의 탈북을 알선하고 있다. 탈북자의 입장에서도 한국행을 희망하지만 방법을 몰라 브로커에게 의존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주중 한국대사관 측은 "최근 탈북자 상당수가 브로커들에 의해 이끌린 사람들"이라며 "탈북자들이 한국행을 결심, 실행하는 과정에는 대부분의 경우 브로커가 개입돼 있다"고 밝혔다.

브로커들은 중국에 장기간 거주하는 탈북자들을 찾아내는 '모객(募客)' 활동까지 벌이고 있다. 많게는 수십명씩 탈북자들을 모집해 한국 공관이나 외국 대사관.학교 등에 '밀어 넣기'를 시도하면서 큰돈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탈북자 문제에 강경한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은 물론 중국 내에 체류하고 있는 순수 탈북자들의 안전마저 위협하고 있다.

탈북지원단체인 피랍탈북인권연대 도희윤 사무총장은 "정부가 탈북자들의 요구를 외면하는 현실이 브로커들의 기업화를 부른 것"이라며 "탈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개혁.개방이 선행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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