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햇볕' 초심을 살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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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햇볕'이란 말은 이제 여염집 안방농담의 감초로 전락해가고 있다. 그렇다고 국민 모두가 햇볕정책의 역사적 의의를 전면 부정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북측의 '내심(內心)'을 제대로 읽지 않으면서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에 몰입해 '유화'와 '주기'를 반복하다 보면 뭔가 되지 않겠느냐 하는 우리 정부의 정책추진 방식과 태도다.

***퍼주기.유화책으론 한계

그래서 국민의 70%가 햇볕정책의 수정을 원하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온다(문화일보 조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햇볕당국'은 대안부재를 내세워 자기수정을 거부하면서 오로지 북측 거동에 따라서 일희일비(一喜一悲)하고 있다.

지난달에 있었던 제5차 장관급회담은 북한이 미국의 테러참사에 따른 국제정세 혼돈과 20%를 밑도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국정수행평가(중앙일보 조사)상황하에서 국면전환용으로 제의한 결과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향후 당국간회담.실무접촉.민간교류행사 등에 대한 빼곡한 일정을 합의한 때문에 '남북관계 정상화로의 방향정착'인 것으로 보일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측이 앞으로 '퍼 주어야 할' 사안과 이산가족상봉 논의 약속 빼놓고는 거의가 군사분야에 관련된 구체적 해결 없이는 의미가 없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군사분야 논의와 김정일답방 논의는 모든 회담과 대화에서 금기시 되고 있으니 무슨 정부대표간 상급회담이니 실무회담이니 하는 것에 큰 기대를 걸 수가 있겠는가.

이러한 상황이라 북한의 발전(發電)부문 현대화를 위해 18억달러의 대(對)한국채무 일부를 사용하자는 러시아 제의에 대한 국민적 시선이 곱지가 않다. 그리고 재무능력이 고갈된 현대아산을 금강산의 '21세기판 봉이 김선달'로 만들려고 남과 북이 협력하려는 것이냐는 시중에서의 비아냥이 들린다.

정부와 '햇볕론자'들은 회담을 지속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감지덕지할 만하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과거의 적대적 대화단절 시기에서의 '대화 필요성'과 현재의 북한에 의한 '대화의 도구화 전술 상황'을 성격 구분해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닐까.

자기변신의 의도와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오히려 남한정부의 선의와 '퍼주기'를 '접수하는' 것이 북측의 시혜라 생각하면서 남측의 일방적 추종만을 기대하는 북한을 생각 없이 따라만 다닌다면 문제다.

이는 북측의 잘못된 현실인식과 행태를 더욱 고착.강화시켜주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위협해소 필요 때문에 택한 '유화책'은 오히려 많은 경우 상대로 하여금 위협의 협상 효용성에 대한 비뚤어진 자신감을 고무했음을 역사적 사례들이 증명해 놓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결국 우리 한반도 문제의 처리는 민족정서를 중시하면서도,우선 국제관계의 틀 속에서 현실주의 길을 좇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래서 金대통령과 김정일위원장은 클린턴 대통령 말기에 '다된 밥'을 부시정부가 '재를 뿌린' 것이라고 하는 미련을 빨리 떨쳐버려야만 한다.테러참사로 미국 공화당 정부와 의회는 대한반도정책에 경색된 입장을 계속 취할 것이 자명하다.

그리고 문제의 핵심이 결국 군사분야인 현실을 감안할 때 남과 북은 모두 미국과의 '타협적' 혹은 '공동의 보조'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

***'햇볕 핵심부' 새 각오 필요

그렇기에 우리 정부가 당장 할 일은 북한지도자로 하여금 기대를 낮추고 대미협상에 진지하게 나서도록 만드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대북 '유화 일변도'에서 탈피해 우리의 원칙 고수와 철저한 상호주의의 적용이 훨씬 효과적이다.

앞으로의 모든 대북회담과 대화 속의 으뜸목표와 초점은 김위원장으로 하여금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를 포함한 군사분야 문제해결이 대남 및 대미관계 개선의 선결과제임을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 돼야 한다.

이제 우리의 대북정책은 새롭게 변화하는 국내외 안보환경 조건과 얼마 남지 않은 현정부의 임기에 맞춰 그 기본자세에서부터 수정될 필요가 있다.군 최고통수권자의 국군의 날 기념사 관련 실수(?)에 대해 대부분 국민들은 극히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햇볕 말기증상을 극복하고 '햇볕초심'을 살리는 길은 북측의 '선의'가 아닌 우리 '햇볕 핵심부'의 새로운 각오에 달려있는 것 같다.

金東成(중앙대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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