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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위 대해부] 외국기업 뛰는데 국내기업 발묶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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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솔직히 소관 업무 중 재벌정책을 떼어냈으면 좋겠다. 특별법을 만들든지 재정경제부가 가져가든지.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는 비난을 받는 데 지쳤다. "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의 이같은 고백은 최근 공정위가 처한 상황을 보여준다.

공정위 간부로 일한 적이 있는 한 재계 인사는 "재벌에 대한 규제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일리가 있었지만 이제 시대가 변했다. 삼성전자의 외국인 주주가 60%를 넘을 정도로 시장이 개방됐다. 최고경영자가 탈만 나도 바로 주가가 떨어질 정도로 주주들의 경영감시가 치밀하다. 그럼에도 공정위의 정책은 재벌 규제 일변도다" 라고 지적했다.

◇ 시대 변화 못따르는 대기업 정책= "재무구조가 좋으면 뭐합니까. 내 돈으로 사업을 할 수가 없는데. "

부채비율이 55%(6월 말 기준)인 우량기업 SK텔레콤은 출자총액한도에 걸려 있다. 정부가 추진한 차세대이동통신사업(IMT-2000)에 출연금으로 내놓은 6천5백억원이 출자총액한도 초과분으로 잡혔기 때문이다.

SK 관계자는 "부호분할다중접속(CDMA)기술 향상과 4세대 이동통신 개발, 무선 인터넷 개발업체 등에 대한 투자가 시급한데 출자총액한도가 발목을 잡고 있다" 고 호소했다.

시장 개방은 국내 경제환경을 빠르게 바꿔놓고 있다. 외국계 지분이 50%인 한국바스프는 자산총액이 9천1백억원인 대기업인데, 금호석유화학.삼성석유화학 등 경쟁사가 받는 규제를 받지 않는다. 30대 그룹으로 지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30대 그룹 계열사란 이유만으로 경쟁관계인 외국계 기업에 비해 역(逆)차별을 받는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시장' 이란 파수꾼이 생긴 것도 중요한 변화다. 지난해 1월 신동방과 신명수 회장은 주주에게 알리지 않고 신동방의료 등 계열사에 지원한 혐의로 소액주주로부터 소송을 당했다.

공정위는 "순환출자가 급증하고 미미한 지분을 가진 총수가 전 계열사를 지배하는데다 계열사 늘리기 등 재벌의 무분별한 선단식 경영이 여전하다" 며 규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에 대해 강명헌 단국대 교수는 "재벌의 행동을 억제해 경쟁을 촉진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결과적으로 재벌 규제에만 치중됐을 뿐 궁극적인 목표라 할 수 있는 경쟁 촉진에는 실패했다" 고 평가했다.

◇ 기업 활력 억누르는 규제=시스템통합 회사인 삼성SDS는 출자총액제한 제도의 무서움을 실감한다. 순자산 1천억원에 다른 법인에 대한 출자가 1천억원이다.

현행 제도로는 벤처기업 투자 등 총액한도(순자산의 25%)에서 빠지는 부분을 빼도 5백억원을 줄여야 한다. 고심 끝에 이 회사는 과징금을 내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출자를 줄이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그 출자가 회사의 장기 전략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3년에 가까운 시간을 주었는데도 초과 출자분을 해소하지 않은 재계가 시한이 다가오자 규제를 풀라고 요구한다" 고 지적했다.

경기침체가 장기화하는 상황에서 기업의 투자를 북돋우기 위한 규제완화의 필요성이 거듭 제기되자 공정위는 '사실상 출자총액제한 제도를 폐지하는 것' 이라고 강조하며 순자산의 25%를 넘는 출자분에 대해선 의결권을 제한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재계는 "기업과 출자의 생리를 모르는 발상" 이라며 평가절하했다. 두산그룹 관계자는 "의결권을 제한받으면 핵심 업종을 단계적으로 바꾸거나 외국계와 합작하는 것이 곤란해진다" 고 지적했다.

30대 기업집단 지정 제도의 직.간접적인 압박도 심각하다. 하나로통신은 올해 30대 그룹으로 새로 지정되는 바람에 초고속통신망 가입자를 늘리려고 인수한 광주의 한 케이블방송국 지분 70%를 팔아야 할 처지가 됐다.

30대 그룹은 이런 업체의 지분을 30% 이상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자산이 하나로통신의 8배가 넘는 대표적 독과점업체(시장지배적 사업자)인 한국통신은 공기업이란 이유로 30대 그룹 규제를 받지 않는다.

하나로통신 관계자는 "공정위의 감시망에 놓여 있다는 점만으로 심리적으로 위축돼 요금인하 등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을 펼치기 어렵다" 며 "자산이 커져 30대 그룹에 속하게 된 것이 이렇게 큰 굴레가 될지 몰랐다" 고 털어놓았다.

기획취재팀

*** 논란빚는 공정위 정책

◇ 30대 대규모 기업집단 지정=1986년 처음 도입할 당시에는 계열사 자산총액이 4천억원 이상인 그룹을 대상으로 했다.

그 결과 물가상승과 경제규모가 커짐에 따라 대규모 기업집단수가 87년 32개에서 90년 초 53개로 늘었다. 90년부터 기업집단 소속 회사의 자산총액(합계)을 기준으로 상위 30개 그룹만 지정해왔다.

공정거래법 개정 작업에 참여한 이규억 박사는 "30이라는 숫자는 우리나라 사람이 좋아하는 10진법의 관행 아래 규제범위를 확대하려는 주무 부처의 시각에서 자의적으로 선정된 것에 불과하다" 고 지적했다.

대규모 기업집단으로 지정되면 경쟁을 제한하는 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계열사간 상호출자 금지▶출자총액 제한▶계열회사에 대한 채무보증 금지▶그룹 소속 금융회사와 보험사의 의결권 제한▶대규모 내부거래 때 이사회 의결 및 공시 등 각종 규제를 받는다. 또 세법과 외국환관리법 등 29개 법률의 규제 대상에 오른다.

◇ 출자총액제한=30대 기업집단에 소속된 계열사들은 자신의 순자산의 25%를 초과해 국내 다른 회사의 주식을 취득.소유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

처음 도입된 86년에는 순자산의 40% 이내로 규정했다가 94년에 25%로 강화했다.

외환위기 직후 외국자본에 의한 적대적인 인수.합병(M&A)이 우려된다는 지적에 따라 폐지됐다가 99년 재벌개혁이 강조되면서 부활했다.

***힘센 공정위

공정거래법을 만들려는 시도는 1963년 이래 여러 차례 있었는데 재벌의 반대에 밀려 번번이 실패했다.

구색을 갖춘 공정거래법은 80년 말이 되어서야 탄생했다. 당시 집권한 신군부가 '개혁세력' 으로서의 정당성을 과시하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고 공정거래법 제정에 참여한 이규억 박사는 평가했다.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질서를 확립하려는 경제헌법적 기능과 위상을 갖는 공정거래법이 헌정 질서를 흔든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제정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법 제정과 기관의 설립배경이 이랬기 때문에 공정경쟁 촉진에 초점을 맞춘 선진국의 공정거래기구와 달리 우리 공정거래위원회는 경제력이 재벌에 집중되는 것을 막는 데 치중하게 됐다.

공정위는 대기업집단의 경제력 집중을 각종 수치를 통해 직접 규제하고 있으며, 기업결합에 대한 최종 승인권도 갖는다.

하도급 분야와 각종 표시.광고물의 불공정행위도 별도 법령을 통해 규제하고 있으며, 최근엔 전자상거래 분야의 소비자보호에까지 업무영역을 확장했다.

공정위의 권한은 금융회사들이 무서워하는 금융감독위원회(금융감독원)의 권능보다 더 세다. 금감위는 자료제출 명령권과 계좌추적권밖에 없지만, 공정위는 현장조사권을 가졌다. 수사기관을 제외하고 회사에 직접 찾아가 조사할 수 있는 권능을 법으로 부여받은 곳은 공정위와 국세청뿐이다.

공정위는 국세청과 똑같이 자료제출 명령권과 함께 일종의 압수인 영치권(領置權)도 갖는다. 한시적이지만 국세청의 계좌추적권과 비슷한 금융거래정보 요구권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금감위와 달리 소관법률인 공정거래법.하도급법 등을 위반한 사업자에 대해선 공정위만이 검찰에 고발할 수 있는 '전속고발권' 을 갖고 있다.

형사범을 법정에 세울지 말지를 단독으로 결정하는 검찰의 기소독점주의처럼 공정위는 공정거래법 위반자에 과징금과 함께 형사적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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