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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키워보니 엄마는 언제나 위대한 존재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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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호 20면

“오빠가 장발 단속에 걸려서 머리카락이 잘린 채 집으로 돌아왔어요. 엄마가 파출소로 갔죠. 파출소장한테 사과를 받아내고 모자까지 선물로 받았어요.” 50대 채윤희 올댓 시네마 대표는 엄마의 위대한 힘을 느꼈을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대한민국 엄마들은 자식이 걸린 일이라면 상대가 국가라도 과감히 맞서 왔다. 그뿐일까. 우리 기억 속 어머니는 자식과 가족의 위기가 닥치면 약한 여자에서 철인으로 변신했고, 끼니를 잇기 힘든 때에도 자식들을 대학에 보냈다. 새벽녘 어머니의 기도 소리는 그 자체로 삶의 자양분이 됐다. 20~60대까지, 137명의 응답자가 전하는 ‘우리 엄마가 가장 위대해 보였을 때’다.

우리 엄마가 가장 위대해 보였을 때

유명환 장관 '병석에서도 자식위해 웃는 얼굴'
유명환(64) 외교통상부 장관은 8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회고했다. 유 장관은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셨고 나는 교회에 다녔는데 ‘한 집안에는 한 종교를 갖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 한 차례만 하셨을 뿐이다. 자식을 위한 당신의 정성 어린 기도를 계속하셨다”고 했다. 유 장관은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에도 자식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늘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고 했다.

주호영 특임 장관도 칠순을 넘긴 어머니의 기도를 꼽았다. 주 장관은 “무릎 관절이 온전치 않아 제대로 걷지도 못하시면서 몇 해 전 젊은이들도 힘들다는 설악산 봉정암으로 가족을 위해 기도하려 가셨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기도가 주는 힘은 세대를 초월했다. 회사원 문정윤(29)씨. “고3 때 부모님과 대구 팔공산에 갔는데, 살을 에는 추위였다. 바깥에 나갈 생각을 못하고 숙소로 들어갔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머니가 산 정상 부처님 앞에서 나를 위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밴쿠버 겨울올핌픽 은메달리스트 성시백 선수는 “어머니는 올림픽이 열리기 전 절에서 3000배를 하시고 밴쿠버에 와서도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절에서 사셨다”며 “그 얘기를 듣고 눈물을 쏟았다”고 말했다. 응답자들의 상당수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를 힘의 원천으로 꼽았다.

이을용 선수 대학실패 가출 '그래도 믿는다'
어머니들은 자식의 선택을 믿고 지원했다. 시민단체 간사 이희수(44)씨는 “아버지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선택을 엄마는 이해하고 수용했다”고 했다. 20대 이주성씨는 “동생이 유학 간다고 하니 다들 말렸는데 어머니만 ‘우리 아이는 큰물에 데려다 놓으면 크게 될 아이’라며 지지했다”며 “어머니의 결단은 위대하다”고 했다. 채윤희 대표도 “20대에 가장이 된 오빠에게 큰아버지가 빨리 취직하라고 했을 때 엄마는 ‘아이들은 자기가 꿈꾸던 일을 해야 한다’며 오빠의 연극을 지원해줬다”고 했다. “청년 실업 이야기로 사회가 시끄러워도 엄마는 우리 3남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도와주고 용기를 준다.” 조은혜(20)씨 얘기다.

‘나는 너를 믿는다’는 엄마의 메시지는 길 잃은 아들을 되돌아오게 하는 마법사였다. 치과의사 백승엽(42)씨는 “중1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평범한 주부였던 어머니가 자식들을 다 키우기엔 역부족이어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몇 년을 친구집에 얹혀 살면서 나는 전형적인 비행 청소년이 돼갔다. 고3이 막 됐을 때 찾아오신 어머니를 ‘잔소리나 하겠구나’ 하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맞았다. 어머니는 나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오직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셨다. 3시간 동안…. 그 이후 난 새사람이 됐다.”

“강릉상고에서 축구를 하다 4강에도 못 오르고 대학 진학도 실패했다. 가출했다. 공사판을 떠돌기도 하고 충북 제천에서 나이트클럽 웨이터로 일하기도 했다. 부모님께서는 쌀가게를 하고 계셨다. 꾸중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다독여 주신 어머니 덕에 다시 축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강원FC 이을용(33) 선수의 회고다. 김영환(55) 민주당 의원은 “학생 운동을 하다 치과대학에서 제적당하고 투옥됐다.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시던 어머니는 좌절감이 컸겠지만 오히려 저에게 용기를 주셨다”고 했다. 김현(54) 변호사도 “대학 시절 데모로 정학 당했을 때나 사법고시 면접시험에 낙방했을 때, 수없는 좌절을 겪을 때마다 어머니는 옆에서 조용히 위로하고 힘을 줬다”고 했다.

40대 황모 교수는 “초등학교 때 용돈을 벌기 위해 신문 배달을 시작했는데, 며칠 만에 힘들어서 못 가겠다고 하자 어머니께서 대신 배달을 나가겠다고 해 함께 나갔다. 자식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셨는데, 한번씩 추운 새벽에 깨면 신문 배달을 가자며 나를 깨우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는 사연을 보내왔다. 프로야구 SK 와이번즈의 김성근(68) 감독은 “한국으로 떠나올 때 (재일교포인) 어머니가 속이 타고 괴로웠을 텐데 내가 부담을 갖지 않도록 강인한 모습을 보이셨다”며 그때 그 모습이 자신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김군호(49) FN가이드 사장은 어머니가 분노와 슬픔이 교차된 표정으로 회초리를 들었던 순간을 잊지 못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 반에는 가게에 가서 물건 훔치는 것을 자랑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문방구에서 내 역할은 이것 저것 달라며 정신을 분산시키는 역할이었다. 나중에 ‘공로’를 인정받아 지우개를 받았다. 신나고 짜릿한 경험이었다. 집에 가서 엄마에게 자랑했는데…. 어머니의 따가운 회초리, 눈물 어린 설득, 그것은 이후 내 삶의 가치 판단 기준이 됐다.”

김주성 선수'척추장애 어머니가 업고 다녀'
많은 응답자들은 자라면서 어머니에게서 초인의 힘을 느꼈다고 했다. 강원대 박정애(40)교수는 “7살 때 명절에 사촌 오빠가 야구선수 흉내를 내며 휘두른 빨래 방망이에 맞고 쓰러졌다. 고관절로 평생 다리를 절며 살던 어머니가 나를 안고 2시간 걸리는 읍내병원까지 달렸다. 지금도 이마의 상처를 만지면 그때 엄마에게서 나던 음식 냄새, 땀 냄새, 단숨이 생각난다”고 했다. 대학원생 강나리(25)씨는 “6살 때 목욕탕 물에 빠졌는데 어머니가 물속으로 뛰어들어오다 발톱이 빠져 피가 철철 나는데도 놀란 나를 안아 다독여 줬다”며 엄마의 힘을 느낀 순간을 얘기했다. “초등학교 때 엄마가 큰 수술을 하셨는데, 수술 부위가 잘못돼 피가 솟구치는데도 우리가 놀랄까 봐 침대 시트로 꾹 누르고 우리를 바깥으로 내보내셨다. 초인적인 힘이었다.” 민유정(35)씨 얘기다. 권태명(51) 삼성화재 상무는 “중학생 때 다리를 다쳤는데 쉰을 훌쩍 넘긴 연세의 어머니가 15리가 넘는 병원까지 업고 뛰어가신 게 생각난다”고 했다.

농구선수 김주성(31)씨의 어머니는 척추 장애가 있다. “허리가 아픈 어머니가 키가 큰 나를 업고 키우셨다. 학교에 오셔도 당당하게 오셨다. 부모님이 창피한 적도 없진 않았다. 그러나 부모님은 당신의 장애 때문에 내가 피해볼까 봐 더 당당하게 하셨다. 동시에 남에게 절대 피해주는 행동은 하지 말라고 하셨고 나는 그렇게 자랐다. 뭐든 열심히 했다.” 김주성 선수는 "내가 아이를 낳아 보니 어머니가 키 큰 나를 업고 키우신 의미를 알겠다"고 했다. 전여옥(51) 한나라당 의원은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조차 꺼리는 어머니가 총선 때 가게마다 방문하며 나를 위해 적극적인 선거운동을 하셨을 때 내 어머니의 위대함을 느꼈다”고 한다.

김용범 씨 '새벽에 나가 밤 11시까지 공장일'
“대학에 가라. 못 배운 거 후회한다. 나는 못 배웠지만 너희는 배웠으면 좋겠다. 학비는 내가 알아서 하마.” 30대 회사원 김모씨는 강원도 태백 산골의 광부로 일한 아버지의 수입으론 생계 꾸리기도 힘든 상황에서 형제 3명이 동시에 대학에 다녔다고 했다. 어머니의 결단과 희생 덕이었다. 어머니는 새벽에 우유 배달을 하고 오전에는 아파트 청소를, 오후엔 식당일을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다고 한다. 말기 유방암과 싸우고 있다는 50대 장명숙씨는 “아버지가 빚 보증을 잘못 서서 망할 순간에도 엄마는 흔들리지 않고 가족들을 다독였다”며 눈물을 흘렸다.

이강래(57) 민주당 원내대표도 “어머니의 희생과 인내로 어려운 시절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했다. 남상명(62)씨는 “50년 전 태풍 사라를 만나 우리집의 모든 것이 파괴돼 8식구가 거리에 나앉게 됐을 때 평소 단아하던 어머니가 아버지를 설득, 장사길로 나섰고 나를 유학까지 보냈다”고 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사별하고 여러 명의 자식들을 키워온 삶 자체를 ‘엄마의 힘’으로 꼽은 이들도 많았다.

회사원 김우용(35)씨는 “중학교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입원해 생계가 막막했을 때 사회 생활 경험이 없던 어머니가 한 치 망설임 없이 운전면허증을 따서 직접 운전을 하며 거래처를 유지했던 때”를 기억했다. 김용범(36)씨는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진 뒤 굉음과 분진이 가득한 공장에서 꽃다운 청춘을 다 바친 어머니를 기렸다. “새벽 6시에 가족들 아침식사를 챙겨 놓고 일을 나가 밤 11시가 넘어서야 들어오셨다. 퇴근길에 단팥빵을 잘 사오셨는데 철없던 시절, 늦은 밤에 먹는 그 간식이 나는 그저 맛있을 뿐이었다.” 모철민(51) 국립중앙도서관장도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신 뒤 어머니가 가족 대소사를 다 책임지셨다”고 했다.

자식을 넘어서 가족 전체에 대한 헌신으로 어머니의 힘을 기리는 이가 적지 않았다. ㈜예라고 허은아 대표는 “어머니는 아버지가 암에 걸렸을 때 헌신적으로 간호해 살려냈다”고 했다. 공무원 문영신(29)씨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고혈압과 당뇨, 폐암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10년 동안 간호하고 결혼 안 한 고모까지 간병한 어머니가 정말 위대하다”고 했다.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우리 어머니의 위대함을 느낀 경우도 꽤 있었다. 권혁용(43) 고려대 교수, 주부 김미연(45)씨, 교사 정명순(64)씨, 구재상(46) 미래에셋 자산운용 사장, 서효중(42) 가톨릭대 교수, 여자 프로농구 신한은행 플레잉 코치 전주원(38)씨 등. 이재성(40) 엔씨소프트 상무는 “자식을 키워보니 매 순간 어머니의 위대함을 생각케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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