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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소비, 너만 믿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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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경제가 어려울수록 건전한 소비가 필요합니다. "

한국은행이 지난 1일 서울 남대문시장 맞은편 본점 건물에 현수막을 내걸었다. 해마다 10월 초 저축을 권장하는 내용을 걸어오다 처음으로 소비를 강조하고 나섰다. 세계적으로 경제가 어려운 판에 미국 테러사태의 영향이 현실로 나타나면서 경기 회복이 더욱 늦어질 것으로 예상되자 소비의 필요성을 주창한 것이다.

올들어 아홉차례나 금리를 낮췄지만 미국 경제가 3, 4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이 예고되는 가운데 미국은 물론 주요 국가들이 소비가 살아나기만을 고대하고 있다. 미국의 소비 위축은 당장 한국의 수출에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소비는 여름휴가철에 이어 할로윈데이(10월 31일).추수감사절(11월 22일).크리스마스(12월 25일)에 집중된다.

그런데 올해는 테러사태 이후 급랭한 소비심리 때문에 대목을 기대하기 어렵다. 산업자원부 김칠두 무역투자실장은 "테러 여파로 크리스마스 특수 등에 차질이 생겨 4분기로 예상한 수출회복 시점이 내년으로 늦어질 것 같다" 며 걱정했다.

◇ 추석 경기 예년만 못해=주요 백화점의 추석(9월 21~30일) 매출은 지난해보다 15.2~19.2% 늘었다. 특히 백화점 상품권은 지난해보다 두배 넘게 팔렸다. 하지만 일반 상품의 매출 신장률은 지난해의 절반 수준으로 낮아졌다.

지난해 42%를 기록한 롯데백화점의 올해 매출 신장률은 19.2%로 집계됐다. 매출 신장세는 이어졌는데 증가폭이 낮아졌다.

할인점도 추석 매출이 10% 정도 늘었는데, 이는 할인점업계 연평균 신장률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지난해 추석 때 40% 신장한 신세계 이마트의 올 추석 매출은 10.1%로 집계됐다.

더구나 고객을 할인점과 백화점에 빼앗긴 재래시장 상인들은 추석 대목을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반응을 보였다. 남대문시장에서 여성의류를 파는 조윤보(60)씨는 "지방 상인은 물론 휴일마다 찾아오던 조선족의 발길도 올 추석에는 뜸했다" 고 말했다.

남대문시장주식회사 곽명용 과장은 "할인점과 인터넷 등 새로운 업태가 등장하면서 몇년째 재래시장 경기가 내리막길" 이라고 덧붙였다.

◇ 세계가 미국 소비를 쳐다본다=테러사태 이후 소비지표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다. 미국 경제가 어느 쪽으로 기우느냐는 소비자들이 지갑을 얼마나 여느냐에 달린 것으로 분석될 정도다.

하지만 최근 나온 소비지표는 어둡다. 지난달 말 발표된 9월 소비자신뢰지수는 97.6으로 11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낮아졌다. 미국 소매.무역협회는 추수감사절.성탄절 대목의 소매 판매가 지난해에 비해 2.5~3% 증가하는 데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해 증가율(5.3%)의 절반 수준이다. 협회는 "요즘같이 소비가 줄면 연말 대목 판매는 5년 만에 가장 낮은 신장률을 보일 것" 이라고 예상했다.

이에 비해 1일 나온 8월 중 소비지출.가처분소득은 7월보다 높게 나타났다. 감세(減稅)와 세금 환급 덕분에 소비지출은 0.2%, 가처분소득은 1.9% 증가했다. 그러나 조사 시점이 테러의 영향을 반영하지 못한 것이라서 감세로 소비를 지피려는 정책이 효과를 낼지는 더 두고봐야 한다.

◇ 소비가 성장에 미치는 영향 커져=지난해 국내 경제성장률이 8.8%를 기록했을 때만 해도 민간소비가 성장에 미치는 영향(기여율)은 40%를 약간 웃돌았다. 견실한 수출과 설비투자의 기여율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기가 급격히 나빠진 올 2분기에는 수출의 기여율이 뚝 떨어졌고, 특히 설비투자는 오히려 성장률을 끌어내리는 쪽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민간소비의 기여율이 50%를 넘어섰다.

정문건 삼성경제연구소 전무는 "소비심리 위축은 국내 요인도 있지만 미국 등 세계 경제의 침체 전망 때문" 이라며 "경기부양 정책을 통해 정부가 시장이 회복되리란 믿음을 주어야 한다" 고 강조했다.

오문석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소비심리는 내년 상반기까지 나쁘고, 내년 하반기에도 그다지 좋아지지 않을 것 같다" 면서 "서비스산업을 육성하고 부유층의 해외여행과 명품 소비 욕구를 국내에서 어느 정도 채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 내수진작 방안을 찾아라=정부는 재정지출을 늘리는 것 외에 뾰족한 방안을 찾지 못한 상태다. 금리를 더 내릴 수도 있지만 이자소득으로 소비하는 경우마저 줄이는 역효과를 낼까봐 신중한 입장이다.

세금을 덜 거둬 가정이나 기업에서 더 쓰도록 유도하는 방안은 세법을 고쳐야 하므로 내년부터 가능하고 효과도 늦다. 내년부터 낮추기로 한 소득세율을 앞당겨 적용하거나 세율인하폭을 높이는 방안도 있지만 국회에서 결정할 문제다.

정부는 미국의 테러응징 작전이 중동전으로 번지진 않을 것으로 보고 심리적 불안감을 진정시키는 쪽으로 접근하고 있다.

해외여행과 골프 수요를 국내로 돌리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패션.디자인 등 직업.예능 학교와 어학연수원 시장을 개방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은 해외 유학과 연수를 위해 빠져나가는 자금을 붙들기 위해서다.

재정경제부는 외제차와 수입품 이용에 대한 비난과 소비 양극화 현상에 대한 지적도 소비를 위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보고 '소비가 상대방에게는 소득' 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방안을 찾고 있다.

정철근.김준현.홍수현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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