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명의 오! 캐스팅] 3. 의리의 사나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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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톱스타 박중훈씨의 데뷔작은 20여년 전에 제작된 이황림 감독의 '깜보' 다. 당시 박씨는 주인공에 캐스팅되기 위해 제작사인 합동영화사를 매일같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결국 장 폴 벨몽도를 닮은 듯한 외모의 새내기였던 그는 전형적인 미남미녀 연기자가 득세하던 그 시절에 이 감독에 의해 주인공으로 낙점되었다. 이후 박씨는 청춘 스타로 발돋움하고 누구보다 활발하게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며 영화 배우의 길을 걸었다.

이후 그는 이 감독의 새 영화에서 단 한 신 분량의 장면에 등장하거나 주인공으로 나서기도 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을 이어갔다.

이유는 자신을 영화 배우의 길로 들어서게 해준 감독에 대한 '보은' 때문이었다. 전화 한 통 받고 현장으로 달려가 이 감독의 작품에 카메오로, 단역으로 얼굴을 내미는 박중훈이란 배우의 인간적인 모습은 최근작 '인연' 의 주인공으로까지 이어졌다.

엄청난 에너지로 개성 넘치는 영화들을 쏟아내고 있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엔 어김없이 배우 조재현씨가 등장한다.

김 감독의 데뷔작 '악어' 부터 최근작 '수취인불명' 까지. 이쯤이면 감독의 분신 같은 존재라고 할 만하다.

심지어는 '섬' 에서 '의리 출연' 이라는 명분 아래 다방 레지의 포주 역을 맡아 단 두 신을 위해 추위에 떨며 저수지 물에 빠지는 힘든 연기를 불사했다.

번득이는 눈빛과 악동 같은 표정과 말투로 밑바닥 인생을 연명해가는, 그러나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을 소화해내는 조재현이란 배우 덕분에 김 감독 영화엔 강렬한 생기가 돈다.

국민배우 안성기씨는 배창호 감독과 10여 편이 넘는 영화에서 호흡을 맞춰왔다. 일찌기 배 감독의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 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20여년이 흐른 지금, 한창 촬영 중인 영화 '흑수선' 으로 이어진다.

눈빛만 봐도 서로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두 사람은 그 완벽한 호흡으로 80년대 한국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가며 대중성과 신뢰를 확보하는 성과를 만들어왔다.

그것이 '의리' 이든 '보은' 이든 지속적으로 호흡을 맞춰온 영화 작업은 단순히 인정에 끌리는 것 이상의 결과를 끌어낸다.

조재현씨의 연기자로서의 파워는 김기덕 감독에 의해 발견되고 발전하는 면이 분명히 있고, 안성기씨는 배창호 감독에 의해 다양하게 변주되고 성숙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요즘은 그런 '환상의 커플' 을 만나는 일이 점점 쉽지 않다. 매니지먼트 사업이 거대화하고 한국 영화의 산업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냉정한 비즈니스 논리' 또는 '철저히 작품 자체로 판단하는 것' 이 인간적으로 끌려서 캐스팅에 응하는 것에 우선한다.

그러나 영화는 무엇보다 사람이 중심인 비즈니스이다.

인정사정 봐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더 많이 알고 이해하는 사람과의 친밀한 작업이 더 큰 가능성과 더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음을 선배들의 영화 만들기를 통해서 요즘 새삼 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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