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이야기 마을] 너, 남자친구와 또 헤어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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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거리가 밀려 한창 바쁜데 휴대전화가 울린다. 벨 소리로 미뤄 그 친구다. 어떤 모진 인연인지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줄곧 같은 학교에 다닌 동창이다. 하지만 반갑지 않다. '또 넋두리를 들어야하는구나'하는 불길한 직감이 스친다.

아니나 다를까. "그동안 잘 지냈어?"라는 인사치레가 끝나자마자 신세타령 장광설이 이어진다. 계속 듣고 있을 수 없어 말을 잘랐다.

"너, 남자친구와 헤어졌구나?" "어, 어떻게 알았어?"

이것아. 네가 남자와 한참 연애 중일 때 나한테 전화한 적 있니.별 수 없이 퇴근 후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자리에 돌아와 앉았는데도 얄미워서 일손이 영 잡히질 않는다. 그 친구의 이런 식 전화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단짝은 아니었지만 서로의 집도 왕래하며 제법 가깝게 지냈던 친구였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우리 사이는 소원해졌다. 경미한 공주병을 앓고 있던 그 친구는 인생의 목표가 오로지 남자를 만나는 것처럼 보였다. 미팅은 말할 것도 없고 소개팅을 거의 매일 가졌다. 내가 남자친구가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내게 소개팅을 부탁하기까지 했다.

1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 그 친구가 열애중이라는 소문이 들렸다. 연락이 뚝 끊겼다. 친구의 전화를 다시 받은 것은 이듬해 개강 무렵이었다. 학교 앞 카페에서 만난 친구는 내 안부도 묻지 않고 헤어진 남자친구 욕을 퍼부었다. 한 번 본 적도 없는 남자에 대한 험담을 듣고 있는 게 그렇게 고역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이후 대학시절 동안 친구의 전화를 세번 더 받았고, 우리는 세번 더 만났다. 그때마다 헤어진 남자친구가 의대생과 복학생.고시생으로만 바뀌었을 뿐 나머지 대화내용은 토씨까지 똑같았다.

대학 졸업 후 처음 만난 친구는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았다. 이번엔 유학생이란다. 참 골고루다. 그래도 이번엔 헤어진 남자친구가 준재벌급 집안이어서인지 아니면 친구가 결혼할 나이가 된 때문인지 쉴 새 없는 욕 속에 짙은 아쉬움이 묻어났다.

입이 얼얼하게 매운 닭고기를 함께 먹고 우리는 "자주 보자"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고 헤어졌다. 하지만 친구가 새 남자친구와 헤어지기 전까지는 우리가 볼 수 없을 것임을 난 안다. 이 친구를 위해서라도 앞으론 만나지 말아야겠다. 그가 시집 잘 가서 잘 먹고 잘 살면 혹시 내 배가 아프지 않을까. 오랜 친구이지만 그와 만난 날은 어쩐지 되는 일도 없고 재수가 없었다.

한은주(26.회사원.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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