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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순의 화필, 배꼽티 여자를 그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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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올해 구순(九旬)의 나이. 세상을 보는 눈은 여전히 형형하고, 손끝 또한 무뎌지지 않았다. 그 눈으로 바라보고, 그 손길로 그린 그림들을 모아 신작발표회를 열었다.

"소설가가 소설로 말하듯 화가는 그림으로 얘기하는 거야. 음풍농월식으로 예쁜 그림만 그려선 안되지. 하루하루를 살면서 느낀 바를 작품에 반영해야만 해. "

서울 팔판동 월전(月田)미술관에서 만난 월전 장우성(張遇聖)화백은 '정신이 깃들인 그림' 을 강조했다. 시.서.화(詩.書.畵 )3절을 갖췄다는 월전의 세수는 올해로 꼭 90세. 하지만 여전히 녹슬지 않은 기량으로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월전 미술관 별관인 백월빌딩 3층 가진화랑에선 월전의 구순(九旬)기념전 초대전이 열리고 있다. 오는 26일까지 계속되는 전시에 나온 작품은 20여점. 대부분 20호 안팎의 소품이지만 모두 지난해와 올해에 그린 신작이다. 1999년 학고재화랑의 미수기념 초대전 이래 2년 만의 전시다.

'단군일백오십대손' 을 보자. 배꼽티와 반바지 차림에 색안경을 걸친 여성이 양손에 휴대전화와 담배를 들고 있다. 그림 한켠에는 자작 한시를 실었다. "우연히 어떤 젊은 여성을 만났는데 언뜻 보기에 외국인인가 생각했다…" 는 내용이다. 관점의 차이를 떠나서 구순의 나이에도 세상을 비켜가지 않고, 느낀 것을 화폭에 담아내려는 치열함이 느껴진다.

뼈다귀 하나를 양쪽에서 물고 싸우는 장면을 담은 '개들' 이나 호랑이 행세를 하는 늙은 여우를 그린 '노호(老弧)등 우리 정치판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들도 적잖다. '광우병에 걸린 황소' 나 온통 빨간 바탕에 죽은 물고기가 떠있는 '적조' , 어느 벼락부자가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는 '미소' 등, 월전의 시선은 사회현실 곳곳에 닿아있다.

북망산의 스산한 밤풍경을 담은 '적광(寂光)' 은 다른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병으로 입원 중인 부인을 생각하며 그렸다는 것인 만큼, 쓸쓸함이 배어있다.

월전은 한쪽 귀에 보청기를 끼었을 뿐 여전히 건강하고 꼿꼿하다. 앞으로 작품활동도 계속하고 회고록도 집필할 예정이다.

"비결이랄 게 뭐 따로 있나. 매일 20여분씩 요가를 해 몸을 풀고 일주일에 한두번 골프장에 나가는 정도지. ." 월전이 골프를 시작한 것은 70대중반이던 15년 전. "장춘회(長春會)라고 을유문화사 정진숙 회장 등 70세 이상 된 회원 15명이 매주 화요일에 만나 18홀을 걸어서 도는데 건강에 아주 좋아. "

젊은 작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을 묻자 "나이 먹었다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시대도 아니고…" 라고 서두를 뗀 뒤 진지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예술가는 역사와 철학과 종교를 알아야해. 교양을 갖추고 지성을 형상화하는 게 예술이거든. 기본 교양없이 손끝의 재주만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그 사람은 기술자에 불과한거야" .월전미술관이 10년 전부터 동양의 예술.철학.종교분야 전문가를 초빙해 강좌를 열고 있는 데는, 월전의 이런 마음바탕이 있었다. 02-738-3583.

조현욱 기자

*** 월전의 제자들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월전은 유년시절 한학을 공부하다 18세 되던 1930년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문하에 들어가 한국화에 입문했다.

시.서.화에 두루 능한 월전은 '최후의 문인화가' 라고 불릴 만큼 독보적 영역을 구축했다. 선묘와 수묵담채 위주의 남종화(문인화)를 현대적으로 변용, 형상을 최대한 억제하고 필선을 강조하는 나름의 화풍을 창조했다.

서울대 회화과 초대 교수를 지낸 월전은 누구보다 많은 제자를 두었다. 동양화 전공자는 모두 월전에게 문인화를, 심산 노수현에게 산수화를 배웠던 까닭이다.

월전의 화풍은 은연 중에 제자들에게 배어있다. 이열모 월전미술관장(전 성균관대 교수)은 "선생님은 학부 때는 동양화의 기본에 충실할 것을 강조했고 대학원부터는 각자의 창조적이고 개성적인 세계를 찾도록 격려했다" 고 회고하고 "그럼에도 제자들의 작품에는 선생님의 영향이 곳곳에 나타난다" 고 설명했다.

그는 "선생님은 먹의 농담.선의 강약.굵기 등을 적절히 달리하는 '선의 무궁무진한 변화' 를 특히 중점적으로 가르쳤고 여백의 미, 전통을 벗어난 현대적인 구도 등도 강조했다" 며 "이에 비해 홍익대 출신은 대부분 채색을 많이 쓰고 선의 변화가 별로 없는 것이 특징이라 그림만 봐도 어느쪽 출신인지 판단할 수 있을 정도" 라고 말했다.

이번 구순기념전엔 제자 19명이 한점씩 낸 작품으로 19폭짜리 송축화첩을 만들어 증정, 함께 전시 중이다.

화첩에 포함된 면면은 월전의 계보가 '최대의 한국화 인맥' 임을 느끼게 한다.

이미 정년 퇴임한 원로급만하더라도 회화과 1회 졸업생인 권영우(중앙대).박노수.서세옥(이상 서울대)씨를 비롯, 전영화(동국대).장선백(동덕여대).민경갑(원광대).이열모(성균관대).이윤영(강원대).신영상(서울대)씨 등 굵직굵직한 이름들이 보인다.

또 현직교수로는 정탁영(서울대).김원세(경북대).송영방(동국대).임송희(덕성여대).이규선(이화여대).양창보.부현일(이상 제주대)씨가 있으며 전업작가 이영찬씨, 삼육고 교장을 지낸 신성식씨도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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