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테러리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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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테러(terror)란 원래 라틴어로 '커다란 공포' 를 뜻하는 말이지만 지금은 테러행위, 즉 테러리즘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테러리즘의 정의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보통 '정치.사회적 목적에서 정부나 시민들을 협박.강요하기 위해 사람이나 재산에 가하는 불법적인 폭력의 사용' 으로 규정한다. 이는 미 연방수사국(FBI)이 내린 정의다.

테러리즘이란 말이 탄생한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의 이른바 공포정치 시대였다. 당시 혁명파의 테러를 '적색테러' , 반혁명파의 보복을 '백색테러' 라 불렀는데 1798년 발간된 아카데미 프랑세즈 사전은 테러리즘을 '조직적인 폭력의 사용' 으로 규정했다. 공포정치 자체를 테러리즘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후 19세기에는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테러를 일삼았다. 바쿠닌이나 네차예프 같은 러시아의 아나키스트들은 "현실 정치제도를 바꾸는 유일한 수단은 폭력" 이라며 테러리즘을 옹호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테러리즘은 프랑스 혁명 이전에도 있었다. 중세 때 이슬람 과격단체들은 전력이 월등한 십자군에 맞서기 위해 테러에 의존했다. 당시 십자군 지도자를 암살하던 비밀 결사단은 암살을 거행하기 전에 하시시(hashish)를 마셨는데, 여기에서 암살자(assassin)란 말이 유래했다.

이슬람 원리주의와 테러는 이처럼 역사적으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이번 미국 대참사의 배후 조종인물로 오사마 빈 라덴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고 있다. 본인은 부인하고 있지만 어쨌든 범인들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미국이 미사일방어(MD)계획을 추진하면서 그토록 강조했던 '가상 적' 의 정체가 이제 뚜렷해졌다. 미국의 주장처럼 러시아나 중국이 아니라 바로 테러리즘으로 무장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었다.

2년 전 서울을 방문했던 새뮤얼 헌팅턴 미 하버드대 교수는 『문명의 충돌』에서 냉전체제 붕괴 이후 국제정치에서 문명간의 충돌이 가장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그는 '이슬람의 피 묻은 경계선' 이란 명제로 이슬람 문명과 기독교 문명간의 충돌에 대해 우려했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미국 중심의 백인우월주의" 라고 비판했지만 이번 참사를 보면 그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는 것 같아 섬뜩해진다.

그러나 이런 비겁한 테러리즘은 인류의 이름으로 반드시 응징된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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